"조국이란 진정 이런 것이냐"

<돌베개> 장준하, 그 치열한 발자취의 언저리에서

등록 2004.01.15 14:42수정 2004.01.1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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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문집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독특한 내 독서 습관 때문이었다. 300여 쪽밖에 안되는 얇은 분량에 표지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딱딱한 하드 커버였다. 고급스런 갈색 외장에 글자는 또 금박으로 번들거렸다.

책을 고를 땐 우선 겉표지가 맘에 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가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를 재미삼아 읽겠다고 집어든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당시만 해도 장준하 선생이 누군지, 이런 케케묵은 책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말했듯이 표지가 근사해 보였고 안에 들어 있는 내용도 여느 모험담 가득한 사람의 자서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단지 재미로 읽어보겠다는 나의 생각은 그러나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우선 이 글을 쓴 사람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니 생동감이 덜했고 글자도 내가 가지고 있던 성경책보다도 조금 작을 정도여서 읽어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읽고 난 후에, 나는 비로소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삼국지>나 <수호전> 같은 방대한 스케일의 역사 소설 따위는 한낱 시시한 동화로까지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는 일제 시대를 거쳐 우리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삶을 송두리째 던져버린 한 민족주의자의 삶을 거짓됨 없이, 그러나 눈물겹도록 치열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불로하 강변에 애국가가 퍼졌다. 강물따라 흘러흘러 그 장엄한 애국가의 여운은 물살을 지으며 불로하 깊은 강심으로 스며들었다. (중략) 목메인 애국가는, 이 다섯 청년의 가슴을 울리면서 산 설고 물 선 중국 땅에 한국의 언어를 뿌려놓았다. 끝내 울지 않고는 후렴을 부를 수가 없었다. 아, 조국이란 진정 이런 것이냐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 <돌베개> 중에서


<돌베개>를 끝까지 읽으며, 어린 소년은 끊임없이 가슴을 덮쳐오는 감동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시련이었다. 누구인가. 이 <돌베개>라는 역사서를 내 앞에 준엄하게 던져놓은 그 분, 장준하 선생은 누구인가?

당시는 인터넷도 별로 발달하지 않은 터라 자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집안에 굴러다니던 책을 어렵사리 찾아내 <민족주의자의 길>, <사상계지 수난사>라는 일련의 장준하 문집 시리즈를 발견하게 되었다. 책을 찾는 순간, 자신의 뒷마당에서 유전을 찾아냈다는 미국의 어느 운좋은 사람처럼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단숨에 두 권의 책을 모조리 읽어버렸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장준하 선생이 차가운 조국의 현실 앞에서 풀어놓은 불씨들을 주워 담으려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장차 자라서 장준하 선생처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시련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그러나 그뿐, 하루 종일 수학 문제와 영어 단어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야 했던 그 시절, 장준하 선생을 만난 희열은 너무도 허망하게 가슴속 저 편에 물러나게 되었다.

얼마 전,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 우리 나라에 다시 돌아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의문사를 당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싶어서라고 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이 떠올라 허둥지둥 다시금 책을 찾았다.


한참만에 찾아낸 장준하 선생 문집은 어이없게도 책장 위 구석에서 먼지를 한 움큼 안은 채 널부러져 있었다. 다시금 펼쳐든 <돌베개>는 그러나 철모르던 시절의 가슴에 다가왔던 감동은 더 이상 아니었다. 아무 대책도 없이 그저 장준하라는 인물을 위대한 영웅으로만 묘사해버린 내 스스로의 눈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영웅으로 보려들지 않았다.

대신 냉철한 가슴과 객관적인 눈은, 장준하 선생을 나 혼자만의 영웅이 아니라 이시대 우리가 갈구하고 있는 진정한 지도자로,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를 해결해야 할 기준으로, 오늘날 눈 돌릴 곳조차 없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뚜렷하고도 큰 이정표로써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흥분되는 감동이 사라진 자리에는, 행동해야 할 젊음이 무엇인지, 그래서 내가 지금 밟아야 할 걸음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단호한 돌베개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것은 바람에 흩날려 버릴 불꽃 같은 열정이 아니라,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게 될 가벼운 유행같은 열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심장의 한 가운데서, 내 갈 곳이 어디인지를 끊임 없이 말하며 그리하여 우리에게 약속된, 저 광활하고 찬란한 민족의 앞날을 바라보게 하는 이정표였다.

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장준하 지음,
돌베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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