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야, 우리 먹을 것도 남겨둬라"

등록 2003.04.01 11:20수정 2003.04.0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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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며칠 전 옆집 희준이네 외할머니께서 콩 한줌을 들고 찾아와 아주 반가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산비탈 아래 있는 거, 그 밭 갈아 먹을래유?”
“정말요?”
“인효 아빠가 워낙 밭일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서...“

그야말로 ‘눈물나는 텃밭갈이’ 6년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나무 뿌리로 몸살을 앓고 있는 닭장 옆 밭, 장독대가 있는 뒷밭 등 여기저기 자투리 밭들을 다 합쳐야 20여 평이 채 안됐습니다. 그런데 40평이나 되는 밭을 빌려준다니,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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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키 작은 작물과 키 큰 작물을 사이좋게 심어가며 2모작, 때로는 3모작으로 상추, 시금치, 오이, 토마토에서부터 양파, 대파, 마늘에 이르기까지 10 여 가지나 되는 밭작물을 눈물겹게 갈아먹었습니다. 길모퉁이에서부터 처마 밑까지 손바닥만한 공간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어쩌다 동네 어르신들 밭 옆댕이를 빌려 마늘을 심기도 했지만 땅은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궁리 끝에 산비탈 논을 갈아먹으려고 3년 전부터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버려진지 10년이 넘다보니 논은 완전히 풀숲을 이루고 있었고 비가 오면 물이 차고 경운기조차 들어갈 수 없는 척박한 논이었습니다. 차일피일 미뤄놓고 있다가 올해는 아예 두 손 두발 다 걷어붙이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달려들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던 참에 옆집 희준이 외할머니께서 40평이나 되는 밭을 갈아먹으라고 선뜻 내놓았던 것입니다.

헌데 그 산 아래 밭은 작년 가을에 콩을 심었다가 노루 식구들에게 몽땅 헌납했던 뼈아픈 전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준이네 외할머니가 혹시 홧김에 쇠사슬 달린 덫이라도 덜컹 놓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그 밭이었습니다.


나는 그 노루를 알고 있었습니다. 1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적도 있었으니까요. 재작년부터는 아주 이쁘게 생긴 새끼 노루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산을 오르다보니 우리 가족과 아주 먼발치에서 마주치는 일도 더러 있었습니다.

까짓 것, 노루 가족과 사이좋게 나눠 먹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산에 오르다가 노루 발자국을 발견하면 우리 집 아이들에게 다짐을 놓듯 말하곤 했거든요.


“노루도 니들 친구가 될 수 있단다. 노루가 너희들 해치지 않지? 니들이 해칠 일도 없겠지만 해치겠다는 마음도 품어서는 안 되겠지? 우리가 사는 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노루와 함께 나눠 먹고사는 거나 마찬가지란다...”
“어떻게 노루하구 나눠 먹구 살어? 노루도 밥 먹어?”
“아빠가 산에서 산나물 뜯어오지, 그게 노루가 먹는 밥여,. 그러니까 우리하고 서로 나눠 먹고사는 거지...”

이제 60여 평의 밭을 갈면 우리 네 식구가 먹을 상추 고추 오이 호박 등의 밑반찬뿐만 아니라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의 군것질 거리도 충분히 나옵니다. 밑반찬거리는 먹고 남습니다. 어차피 그 남는 작물은 형제들이나 손님들의 몫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헌데 그 남는 몫을 먹어 치우게 될 대상이 단지 노루라는 것일 따름입니다.

‘노루 새끼들과 나눠 먹는다구? 속 편한 소리, 배장 편한 소리 좀 그만 하라’고 욕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욕먹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땅 한 평도 소유한 게 없지만 정말로 배장 편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어떤 이들은 배장 편하게 산다는 것을 게으른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배장 편하게 사는 게 속 터질 만큼 느릿느릿해 보일런지는 모르겠지만 게으른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비록 텃밭에 불과하지만 나는 전혀 농약을 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일이 잡초들을 뽑아줘야 합니다.

돈벌이로 치자면 아주 게으른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느릿느릿 잡초나 뽑으며 세월을 보내는 그 시간에 다른 돈벌이를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일은 곧 돈이다. 라는 식으로 연결시키면 속 편하게 살고자 하는 제 생활 태도가 게을러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을 돈과 떼어놓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일을 통해 돈을 벌지 못하면 ‘헛일’이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게을러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나 또한 도시 생활을 하면서 일이 곧 돈이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야말로 일에 멱살을 잡혀 질질 끌려 다니는 일의 노예였습니다. 모든 일들이 다 돈많이 벌어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죠. 돈을 버는 만큼 행복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괴로움이 뒤따랐습니다. 자본의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다 보니 어떤 일을 하든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돈과의 연결고리를 잘라내고 일을 속 편하게 배장 편하게 대하다 보니 그 고통에서 점점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게 돈이 되는 일이든 돈 안 되는 ‘헛일’이든 상관하지 않고 즐거운 일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먹고 살수 있냐구요? 필요한 만큼만 먹고살면 됩니다. 적게 버는 만큼 소비를 적게 하고 또 적게 버리면 됩니다. 어지간한 것은 재활용하면 됩니다.

돈은 안되지만 속 편한 일을 하다보니 골치가 훨씬 덜 아픕니다. 마음이 훨씬 편해 졌습니다. 적게 벌지만 마음이 편하니 행복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강 또한 저절로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으면 돈벌이가 되든 안되든 속 편한 일들을 골라서 하려고 합니다.

밭일 또한 누가 뭐라 해도 속 편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제 희준이네 외할머니가 빌려준 밭을 합치면 60여 평 정도가 됩니다. 밭농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텃밭치고는 너른 밭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새로 생긴 산비탈 밭은 노루에게 통째로 다 내 줘도 상관없습니다. 그동안 그 밭 없이도 잘 살아왔으니까요. 그리고 또 노루가 먹는 만큼 다른 일을 더 많이 하면 됩니다. 어차피 적게 벌어먹고 살다보니 시간이 많이 납니다.

노루에게 밭을 내주겠다니? 순전히 손해 보는 장사처럼 보이지요. 아닙니다. 손해 볼 것도 없습니다. 저 같은 인간 종자들이라는 게 본래 노루 보다 계산이 더 빠릅니다.

노루가 내 밭을 침범해 들어온다는 것은 내가 그 만큼 노루의 텃밭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은 노루의 텃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또한 노루의 텃밭인 산을 헤집고 다닙니다. 노루가 좋아하는 산나물을 이것저것 뜯어먹고 살아갑니다. 그만큼 노루가 먹을 것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일군 텃밭을 노루가 몽땅 먹어치운다 해도 손해가 아닙니다. 나는 밭에 나가 싱싱한 생명들의 기운을 받아 건강을 챙깁니다. 밥벌이를 위해 오랫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보면 몸과 마음이 굳어져 갑니다. 나는 밭일을 통해 뻣뻣한 몸뚱아리는 물론이고 뇌 세포조차 회복시킵니다.

애써 가꾼 밭을 고라니가 다 먹어 치운다 해도 나는 건강을 챙길 수 있기에 만족합니다. 물론 건강도 챙기고 또 밭작물도 챙길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하나는 날짐승을 위해 또 하나는 땅속 벌레를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 식구를 위해, 그렇게 한꺼번에 세 개씩의 콩을 심으면서 기도했습니다.

‘노루야, 콩이 다 자라면 우리 식구 먹을 것도 좀 남겨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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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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