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아들의 여자친구 때문에 벌인 소동

여자친구와 온라인 게임과 반전시위

등록 2003.04.07 13:57수정 2003.04.0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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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종종 벌이게 되는 난리가 있다면 단 한 가지다. 골치덩어리 우리아들 새들이와 벌이는 난리다. 당연히 주연은 아들이고 나는 조연인데도 난리는 내가 친다.


새로 산 관리기로 밭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새들이가 벌써 학교에서 돌아오는 모양이다. 윗집 기정이네 세 아이와 함께 오면서 멀리 동구 밖에서도 내가 보이는지 새들이는 기세 좋게 '아빠아아'하면서 길게 목을 놓았다.

학교 끝날 시간에 내가 교문 앞으로 나가기로 했는데 기다려도 내가 안 오니까 친구들이랑 3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걸어서 온 것이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 모양인데 기계소리에 내가 전화를 놓친 것이다.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야단법석은 제목처럼 여자친구와 온라인 게임과 반전시위가 한데 어울려 전개되었다. 여자친구는 내 여자친구가 아니라 새들이 여자친구다.

벼르고 별러서 오늘 진안에 있는 치과에 가기로 한 것은 새들이 이빨이 쥐가 파먹다 버린 옥수수처럼 되어 있어서다. 덧니가 잇몸 옆구리에 붙어 있고 아래 송곳니는 안으로 기울었고 위 송곳니는 밖으로 기울었다. 병사들이 좁은 내무반에서 칼잠 자듯이 앞니는 두 개가 45도 정도로 틀려 있기도 하다.

작업을 마무리하려던 차라 새들이를 밭으로 불러 리어카를 잡게 했다. 호주머니에서 손도 빼지 않은 채로 새들이는 '아빠 치과에 내일 가면 안돼요?'했다. 원래 어제 가기로 했다가 못가고 오늘 간다고 치과원장이랑 약속을 했는데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동안 새들이와 치과 가자고 노래를 불러왔었다.

나는 대꾸도 않고 "어서 집에 가자. 얼른 챙겨 집으로 가자. 치과 약속시간 다 됐다"고 했다. 언덕길에 리어카를 밀어 올리면서 "아빠 나도 피곤하단 말예요" "선생님이 자기는 몽둥이만 들고 1학년 청소까지 6학년들 다 시켰단 말예요" "쉬고 싶단 말예요" 등등 새들이가 이날은 유난히 투덜댔지만 나는 주의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내가 흙투성이 옷을 벗고 물을 데울 새도 없이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있는데 새들이는 욕실에 와서 "아빠 진안까지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눈을 부라리며 "너 게임 하려고 그러지?"했더니 뭐 어떠냐는 듯이 "네"하는 것이었다.


"그딴 생각하지 말고 이빨 좀 닦아라. 네 입에서 냄새나면 창피다"하고는 샤워를 끝내고 나왔더니 새들이는 책가방을 던져 놓고는 새로 키우게 된 강아지 금이랑 마루에서 놀고 있는 것이었다. 새들이는 다시 "아빠, 그러면 진안 가는데 20분 걸리면 치료하는 데는 얼마 걸려요?"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이랑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온라인 게임 써프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양말을 꿰다말고 나는 새들이를 불러 앉혔다.


"새들아. 내가 왜 이 난리를 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네 이를 고치는데 왜 아빠가 이래야 하는지 갑자기 기운이 다 빠진다. 양치질하래도 안하고 도대체 그런 마음가지고 너 이를 어떻게 고치고 간수할 거냐. 이에 정성을 다 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게임 생각만 하고 있는데 내가 너를 끌고 치과에 가서 치료 해 본들 무슨 소용이겠니.

나는 지금 치과 가야지, 7시에 시내 반전 시위에 가야지, 8시엔 네 누나가 한 달만에 집에 오는 날이니 데리러 가야지, 아빠가 지금 정신이 없다."

그제서야 새들이는 게임에서 관심이 조금 돌아온 모양이다. "아빠 지금 양치질 할게요"한다. 자동차 안에서도 나는 잔소리를 계속했다. 이왕 시작된 잔소리의 끝맺음을 확실히 하고 싶어졌나보다. 분명 1년 이상이나 걸리는 치아 교정 작업을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날텐데 장기간에 걸쳐 새들이가 자기 이에 신경을 잘 쓸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새들아. 한 4년 전인가? 네 어금니 충치 생겨가지고 병원 처음 갈 때 아빠랑 약속 한 거 생각나니? 그 약속만 네가 잘 지켰어도 지금 이런 일 없을 것이다. 그 후로 얼마나 약속을 어기고 용돈 주면 과자 맨 날 달고 살고 툭하면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하고 이 닦고 자라고하면 내일 아침에 닦겠다고 하고 아침에는 시간이 없어 그냥 학교 가고 그러니까 지금 이가 야단이 났잖아. 그게 대체 뭐냐?"

모든 잔소리가 그렇지만 나도 자식에게 하는 부모 잔소리의 전형을 그대로 닮았다. 개탄과 걱정 위협과 공포를 섞어가면서 다 네 장래를 위하고 네 인생을 위한 것이라는 토를 꼭꼭 달아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치열과 얼굴 윤곽과의 관계, 이빨과 두뇌관계 등을 전문의처럼 강조할 때는 내가 생각해도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었다.

치과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백운면에 사는 전문 옹기쟁이였다. 치료가 끝난 새들이가 자꾸 내 손을 끌면서 어서 가자고 한다. 이제 막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눈치도 없이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어서가요 아빠 하면서 팔을 잡아 흔들기까지 했다. 이제 여섯시 갓 지났으니까 친구들이 아직 남아 있을 거란다. 새들이 조바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집에 안 갈 거라고 했다. 집에 들르면 7시 반전 집회에 못 간다고 했다. 새들이는 낙심천만한 표정으로 "반전집회에 안 가면 안 되냐"고 했다. 나는 뻔한 얘기지만 그랬다. 친구들 게임이야 나중에 해도 되지만 이라크 파병은 우리가 막아야 한다고 했다. 새들이도 부시 반대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게임은 내일 하자고 했다.

그제야 새들이는 **이와 얼마나 힘들게 약속을 했는데 약속 다시 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하면서 사정사정해서 **이가 시키는 것도 다 해주고 가방까지 들어다 주면서 약속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나는 ** 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들이 여자친구인 것이다. 아하 이런 내막이 있었구나 싶었다. 내가 가끔 장난삼아 말을 꺼낼 때마다 극구 회피하던 여자친구 이름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고 나니 서러웠던 모양이다.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울음보가 터지니 말문도 터진다.

**이는 컴퓨터를 하려면 엄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오늘이 허락 받은 날이라서 다른 날은 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예 콧물까지 흘리면서 다른 친구들이라면 자기도 반전시위에 꼭 갈 테지만 **이 약속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두어 해 전부터 새들이가 꺼내는 친구들 이야기에 꼭 등장하는 친구다. 주로 흉보는 이야기인데 남자애들 보다 힘이 세서 책상을 혼자 번쩍번쩍 든다든가 남자애들이 아무도 못 이긴다든가 그러면서도 마음은 약해가지고 남자들을 때릴때는 꼭 울면서 때린다든가 하는 이야기인데 그 속에 담긴 새들이의 **에 대한 호감이 철철 넘쳐나곤 했었다.

이미 시계는 7시를 5분 남겨놓고 있었고 자동차는 시내 중심가에 들어 서 있었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게임방은 안 될 것 같고 시내에 있는 내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새들이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말도 해 주었다. **이와 재미있게 잘 놀라고 하자 새들이는 좋아서 써프 프로그램 다운받아 설치하는데 10분이면 충분하다고 하면서도 내 전격적인 돌변이 좀 의아한지 아니면 자기 고집이 성취된 데 대한 허탈인지 모를 애매한 표정도 함께 지어 보였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성능 좋은 펜티엄4 컴퓨터를 켜주고 나는 집회장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시동을 걸고 차를 돌리는데 사무실에서 새들이가 다람쥐처럼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운전석 차창을 내리고 '부팅이 안 되니?'하고 물었다. 내내 구겨져 있던 새들이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펴져 있다는 기분에 새로운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왜? 사무실에 혼자 있기 무서워?'하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반전시위에 가겠다는 것이다. 시계를 봤다. 7시를 30분이나 지나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웬일로? 왜 마음이 변했어?'라고 묻자 옆자리에 올라 탄 새들이는 그랬다. 컴퓨터 앞에 앉으니까 마음이 다 풀렸다는 것이다. 정말 자기도 알 수 없는 것에 그렇게 마음을 졸였는데 컴퓨터가 켜지고 나니 게임에 대한 생각이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안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은 게임하고 비교할 수가 없지 않느냐고도 했다.

집회장에 갔을 때는 8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고 시위대는 집회를 끝내고 행진을 하고 있었다. 새들이 누나 새날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다 되어 버렸다. 이건 완전히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것이었다. 잠시 시위대를 따라 차를 몰다가 다시 운전대를 돌려 새날이 마중을 갔다.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우리 부자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것보다도 더 만족스러워했다. 이상하게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치열이 삐뚤어진 게 본인 관리 탓이 아니고 턱 자체가 작은 유전적인 영향이 크다는 치과의사 얘기도 문득 생각이 나서 말해 주었더니 그 보라는 듯이 새들이는 더 신이 났다.

다음날 새들이는 **이에게 약속을 어긴 해명을 잘 했다면서 순조롭게 약속도 다시 만들어 왔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반전시위 가느라고 컴퓨터 못한 것도 아닌데 뭐라고 해명했을까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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