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설렘을 기억하시나요?"

<새벽을 여는 사람들 6> 홀트 영아 일시 보호소 최윤희씨

등록 2003.04.18 15:30수정 2003.04.1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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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3세 미만의 영아들이 새 둥지를 기다리는 홀트 영아 일시 보호소. 5년 째 어린 천사를 돌보고 있는 최윤희(31) 보육사가 그 곳(홀트 영아 마리아 방)의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가로등의 긴 그림자만이 외로이 거리를 메우는 시간. 어느덧 라디오에서 하루의 마감을 고하는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마리아 방을 감도는 아기들의 분내와 땀냄새가 그지없이 향긋하다. 새근거리며 잠든 아기들이 앙증맞은 방귀 소리로 그녀의 분주한 손놀림에 장단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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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신기하게도 아기들이 '아빠'보다 '엄마'라는 말을 먼저 시작해요. 여기에 있는 아기들은 사람이 얼마나 그리운지 보는 사람 아무에게나 '엄마'라고 불러요. 소중하고 귀한 '엄마' 라는 호칭을 모두에게 쓰는 아기들을 보면 기쁘기보다 너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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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그녀는 일주일에 네 번 오후 여섯 시부터 아침 여덟 시까지 야간 근무를 한다. 처음 일을 시작 할 때보다 몸무게가 무려 8kg이나 감량되었다. 비록 육체는 힘들지언정, 그저 아기들만 보면 피로가 싹 가셔버린다. 남들은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녀는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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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사람은 3세 사이에 인격이 형성되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그 시기에 상처받은 어린애를 위해 제가 무한히 해 줄 수 있는 게 좋아요. 많이 안아주고 쓰다듬고 직접 피부로 느끼게 해주면서 사랑을 확인 시켜 주는 것. 그 어떤 교육보다 어린애에게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라 생각해요."

그녀는 입양된 아기들의 소식을 편지로 전해들을 때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순간이라 한다. 그녀가 스물 여섯이 되던 해. 보육사가 되기 위해 그녀는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안정적이고 순탄한 직업을 미련 없이 접었다. 그 후, 단 한번도 후회 한 적이 없다.

"처음엔 반대했던 많은 이들이 지금은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행복한 제 모습을 오히려 더 부러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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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바캉스 베이비, 연말 연시 베이비에 이어 현재 또 하나의 붐이 일고 있다. 이번 2월부터 3월 사이에 태어나 버려진 아기들이 새롭게 '월드컵 베이비 붐' 을 형성하고 있다. 위탁 보모에게 맡겨지는 아기가 다른 해에 비해 2배 가량 늘어 일손이 부족 할 정도이다.

감히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붉은 물결이 출렁거렸던 영광의 거리에 많은 아기들이 버려졌다. 월드컵의 환희 뒤에는 어른들의 무책임한 욕망이 일그러져있다. 그 햇빛 찬란했던 월드컵의 순간이 얼마나 많은 아기들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 그저 우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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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속에 있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 애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른들의 잘못과 무책임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픔을 겪고 있어요.

예전에 이일을 하기 전까지는 단지 엄마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이일을 한 후로는 아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요. 아무리 못 입고 못 먹고 힘들어도 아기는 엄마가 직접 키워야 되요. 시설이 최고급이라 할 지라도 엄마 같을 수는 없어요. 어떤 아이는 애정결핍의 욕구불만을 먹는 걸로 풀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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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아기들이 깨면 가장 먼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요. 그리고 눈앞에 우리가 보이지 않으면 금새 울어 버리고 말죠. 걸음마를 시작하고 옹알이를 하며 엄마라고 말을 뗄 때 정말 너무 이뻐요! 아기들은 백일 전 후로 가장 많이 성장을 하는데, 그걸 지켜 볼 때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한지 몰라요."

아기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쉴 새 없이 깨어난다. 그녀가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며 정성스레 자장가를 불러준다. 연신 이어지는 아기의 트림 소리와 방귀 소리에 그녀는 해맑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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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온 아기들은 울어도 서럽게 울어요. 처음엔 저도 어쩔 줄 몰라 같이 덩달아 울었어요."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한 아기가 구슬픈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엄마' 라고 부르짖으며 우는 소리에 기자는 안쓰러워 옆에 같이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날카로운 울음 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다른 아기들도 덩달아 깨며 같이 울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꽤나 익숙하나 보다. 어쩔 줄 몰라 진땀 흘리는 기자와 달리 결코 성급해 하거나 당황스러워 하지 않는다. 한 사람씩 일일이 살을 맞대며 그녀의 따뜻한 심장 소리를 들려준다. 그녀의 온기를 확인하자 아기들은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쳐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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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이 아기들이 어떻게 자라날지 정말 궁금해요. 그 기대와 호기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요. 어딜 가든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아무리 환경이 힘들어도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잘 견뎌 낼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성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솔직히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 못 됐는지 모르겠어요. 부모들이 워낙 바쁘고 무관심해서 그런 쪽에 세심히 신경을 못 쓰는 것 같아요. 그저 돈만 많이 벌어주는 게 다는 아닌데, 자녀들의 인성교육에 너무 무관심한 것 같아 아쉬워요.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사고가 그리 쉽게 일어나지는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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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이라크 전쟁, 대구 참사, 천안 초 화재의 상처가 곪아있는 잔인한 4월이 간다. 엄지 손가락 만한 아기의 발이 꼼지락 거리며 새벽을 깨운다. 아기가 있는 힘껏 입을 벌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쭉 펴며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아침을 반기는 새까만 눈동자엔 고요한 '생동'이 출렁인다. 기자의 손가락을 잡았던 아기의 작은 주먹 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던 짜릿한 무엇, 벅찬 떨림에 왈칵 눈물이 쏟아 질 것 만 같던 그 무엇이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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