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1)

항일유적답사기 (2) -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

등록 2003.04.20 20:53수정 2003.04.2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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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인(大韓國人) 영웅 안중근 의사,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대한국인(大韓國人) 영웅 안중근 의사,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하얼빈 가는 길

8월 4일, 동북 삼성 답사 첫날이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넓으나 넓은 만주 땅, 미지의 세계를 밟는 설렘으로 간밤에 몇 차례나 잠에서 깼다.


05시 30분, 비가 질척질척 내리는 궂은 날씨로 창밖은 미처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조반도 거른 채 가벼운 차림으로 서둘러 답사 길에 나섰다.

벌써 빈관(賓館: 여관) 앞에는 '중공군' 귀빈용 아우디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중공군 하사관 왕빙(王兵)이란 인상이 서글서글한 젊은 친구였다.

50여 년 동안 냉전 체제에서 반공 교육만 받아왔고, 그런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았던 나로서는‘중공군’을 만나면 무시무시하고 섬뜩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녹두색 제복을 입은 중공군을 마주 대하고 보니, 그는 너무나 순박하고 앳된 젊은이로 적대감보다 오히려 호감이 갔다.

그를 대하자 마치 내 아들이나 조카를 오랜만에 만난 듯 귀엽고 반가웠다. 중공군이라면 무지막지하리라는 내 선입감을 왕빙은 한꺼번에 씻어주었다.


나는 새삼 ‘만남’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사람은 만나야 한다. 설령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 간일지라도 자주 만나면, 봄날에 눈 녹듯 서로 원한이 풀리고 마침내 화해할 수도 있으리라.

중공군 하사관 왕빙
중공군 하사관 왕빙박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 적대감을 갖게 하는 지난날 우리의 교육이 크게 잘못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중생 선생은 드넓은 만주 일대 항일 유적지 장거리 답사에는 승용차의 성능도 좋아야 되고, 군용 차번호 판을 달고 다녀야 불필요한 검문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김 선생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중공군 아무개 부대장에게 부탁해서 이 승용차를 마련했다. 이 나라에서도 민간인은 경찰을 두려워하고, 경찰은 군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06:00, 우리 일행은 궂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창춘(長春)을 떠났다. 승용차가 창춘 시가지를 벗어나자 말로만 들었던, 망망대해 같은 만주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창춘에서 하얼빈까지는 280여 km나 되는 먼 길이었다. 도로는 곡선 길이 거의 없는 대부분 일직선 아스팔트길이었다.

비 내리는 창춘-하얼빈 가도, 도로 양편의 가로수가 싱그러웠다
비 내리는 창춘-하얼빈 가도, 도로 양편의 가로수가 싱그러웠다박도
차창 밖 도로 양편의 가로수가 참 시원하고 아름다웠다.

하늘 높이 치솟은 수양버들 가로수 사이에 띄엄띄엄 라일락이나 소나무가 있었고, 도로 가장자리에는 샐비어, 백일홍, 금잔화 같은 화초도 심심찮게 있었다.

드넓은 만주 벌판은 온통 옥수수 밭으로 초록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이따금 벼논들도 눈에 띄었다.

그 초록의 향연 틈새에 해바라기 밭들이 무료함을 달래듯 띄엄띄엄 샛노랗게 초록의 들판을 수놓았다. 그야말로 비단에 꽃수를 놓은 듯, 초록의 들판이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창춘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길은 서너 시간을 고속으로 달려도 산 하나 볼 수 없는 마냥 초록의 지평선이 이어졌다. 내 상상을 초월한 아득한 평야였다.

만주에서 태어나서 오십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던 김 선생은 이 일대가 지금은 대부분 옥수수 밭으로 초원을 이루고 있지만, 겨울철에는 황량한 허허 벌판으로 변한다고 했다.

시인 이육사는 이런 만주 벌판을 보고서〈광야〉를 읊었나 보다. 육사의 행적을 보면 1920년대 독립군 자금 모금으로 외삼촌 허규(許珪)와 만주도 몇 차례 왕래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육사는 열차나 마차를 타고 이 드넓은 광야를 달리면서 우리 민족에게 조국 광복을 가져다 줄 ‘백마 타고 오는 초인’―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나 보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났다.

육사가 바라던 조국 광복은 허울 좋은 이름으로만 이루어졌을 뿐, 나라는 두 동강으로 잘린 채, 아직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여태 외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다른 외국군대가 이 땅에 주둔하고 있다.

나그네 역시 이 광야를 달리면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이루고, 아울러 지난날 오욕의 역사를 말끔히 씻어 줄 ‘초인’을 목 놓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궂은 비 속의 쑹화강(松花江) 대교, 이 다리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의 경계라고 했다.
궂은 비 속의 쑹화강(松花江) 대교, 이 다리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의 경계라고 했다.박도
창춘-하얼빈 도로를 세 시간 남짓 고속으로 달린 끝에 마침내 전설처럼 얘기로만 들었던 쑹화강(松花江)을 만났다. 쑹화강 다리 위에서 승용차를 멈추고 잠시 쉬었다.

지난날 우리 독립전사들의 숱한 애환이 서려있을 쑹화강은 만주 평야를 무심히 가로지른 채 쉬엄쉬엄 흘렀다.

그 유명한 쑹화강 뱃사공은 보이지 않았고, 낡은 목선 한 척만 강가 모래바닥에서 을씨년스럽게 비를 맞고 있었다. 옛 시 그대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였다.

강둑에는 고삐도 없는 수십 필의 말들이 가랑비에도 아랑곳 않은 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검은색 갈색 흰색으로 야생마처럼 튼튼해 보였다. 어미 말 틈에서 앙증스럽게 풀을 뜯는 망아지가 무척 귀여웠다.

하긴 어린 것 치고 귀엽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남선북마(南船北馬)’라고 하더니 동북 삼성 일대에서는 가는 곳마다 말들이 지천이었다.

동북 삼성에서 지천으로 볼 수 있는 마차
동북 삼성에서 지천으로 볼 수 있는 마차박도
강을 건너면 거기서부터는 동북 삼성 중에서 가장 넓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이라고 했다.

이 헤이룽장성만 해도 그 넓이가 71만여 평방미터로 우리나라 남북한보다 세 배 이상 넓었다. 좁은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먼저 땅덩어리 크기에 그만 기가 질렸다.

이곳부터 우리 일행은 지린성(吉林省)에서 헤이룽장성으로 들어선 셈이었다. 쑹화강 다리에서 조금 더 달리자, 마침내 어린 시절 필름으로나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던 까마득히 먼 이국 땅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은 북만주 벌판, 둥베이 평원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헤이룽장성 성도(省都)로써 인구 550여만의 도시이기도 하다.

하얼빈(哈爾濱)이란 지명조차도 만주족 말로는 ‘그물 말리는 곳’이란 뜻으로 이 도시는 19세기 무렵까지는 쑹화강 연변에 어민이 옹기종기 몰려 살았던 자그마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작은 어촌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러시아가 둥청 철도를 부설한 후, 교통의 중심지가 된 이후다.

하얼빈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귀에 익게 된 것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플랫폼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장쾌하게 쓰러뜨린 이후다. 그래서 하얼빈 하면, ‘안중근’, ‘이토히로부미’를 연상케 할 정도다.

또한 이 도시 일대는 일제 치하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인간 생체 실험을 한 마루타 부대(제731부대)가 있었던 음울한 곳으로, 겨울이면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북국의 고장이다.

우리 일행이 하얼빈을 찾은 날은 온 시가지가 도시 재개발 사업과 도로 확장 공사로 도로가 엉망이었다. 거기다 비까지 내려서 하얼빈의 첫 인상은 마냥 어수선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어딘가 모르게 으스스한 하얼빈 뒷골목
어딘가 모르게 으스스한 하얼빈 뒷골목박도
뒷골목은 물론 간선 도로에도 아직 옛날 영화에서 보았던 마차가 자동차 틈바구니를 심심찮게 유유자적 달렸다.

나는 마치 타임머신으로 한 세기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으스스하고, 불쑥 마적 떼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하얼빈 시가지 중심부에 이르자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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