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과 꽁치 이야기

나의 유년시절의 첫 단추

등록 2003.04.23 06:54수정 2003.04.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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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전 우리집 사남매(문숙 철 훈 헌) 키가 자로 그은 것 같습니다
37년전 우리집 사남매(문숙 철 훈 헌) 키가 자로 그은 것 같습니다박철
바야흐로 꽃피고 새 우는 나들이하기 안성맞춤인 계절입니다. 이때가 되면 주말마다 나들이 길에 나선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젊은 선남선녀들은 꽃보다 화사한 연애를 꿈꾸고, 어린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어디 놀이동산이라도 놀러가자고 막 떼를 쓰겠죠.


모든 초등학교에서는 이미 봄 소풍 계획을 확정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40년 전, 나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동네에 초등학교가 있는데도 나와 누나를 화천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엘 입학시켰습니다. 화천 읍내에 있는 학교까지 장장 30리길을 통학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봄 소풍에 대한 계획을 아이들에게 설명하자 아이들은 교실이 흔들릴 정도로 환호를 하며 좋아했습니다. 40년 전의 일이니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이들에게 무슨 변변한 놀이감도 없었고, 지금처럼 공부나 각종 과외에 매달리는 일이 없어서 아이들은 입버릇처럼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을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한 달 전에 소풍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면 아이들은 손꼽아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 당시만 해도 봄 소풍을 가면 꼭 엄마들이 동행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소풍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을 하시다 그만두신 상태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시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셨고, 나의 어머니는 재봉틀을 돌려 간신히 굶지 않고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매우 빈한한 생활이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적당한 체념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아무리 떼를 써도 엄마한테는 안 통한다. 엄마는 우리를 위해 고생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봄 소풍을 간다고 해도 우리 어머니는 우리 남매에게 김밥을 싸줄 만큼 그런 삶의 여유가 없었고 어머니는 소풍에 따라 가실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며칠동안 엄마에게 졸라댔습니다.

“엄마! 이번에는 꼭 김밥 싸주셔야 돼요. 김밥 안 싸주면 나 소풍 안가요!”


강원도 화천 논미리, 육군 의무중대 앞에서 군복수선을 하며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노릇을 하셨던 어머니는 누나가 아무리 떼를 써도 묵묵부답이셨습니다.

드디어 소풍 가는 날 누나와 나는 새벽같이 일어났습니다. 학교엘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야 늦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누나가 어머니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엄마. 도시락!”

그러자 어머니 신문지로 둘둘 말은 사각 도시락 두 개를 부엌에서 갖고 나오셨습니다. 누나는 도시락을 받자마자 신문지 포장을 풀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습니다. 누나는 도시락을 마룻바닥에 집어던지고 마당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각 도시락 통 안에는 보리밥에 흰쌀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고, 네모난 반찬 통에는 꽁치 두 마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 젊어서 사진. 아마 20대 후반이었을 때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머니 젊어서 사진. 아마 20대 후반이었을 때 아닐까 생각됩니다.박철
누나는 집안사정이 어떻고 말고는 안중에도 없었고 며칠 동안 어머니한테 이번에는 꼭 김밥을 싸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어머니는 누나의 그런 간청에도 끄덕하지 않을 만큼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나는 누나가 미웠습니다. 누나가 악을 쓰며 까무라칠 듯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대자 어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걸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꽁치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 주셨어도 어머니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꽁치는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반찬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김을 살 돈이 없었든지, 아니면 워낙 바빠 김밥을 싸줄 시간이 없었든지 나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문숙아! 철아! 어서 빨리 가! 그러다 늦겠다! 엄마가 내년 소풍에는 꼭 김밥 싸줄게! 얼른 가!”

어머니는 누나를 달랬습니다. 아무리 달래도 누나가 막무가내로 울음을 그치지 않자 싸리 빗자루에서 싸리 한 가닥을 분질러 누나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에잇, 이년아 엄마 마음도 몰라주고 그래 소풍가지마! 내일부턴 학교도 가지마!"

나는 꽁치가 들어 있는 도시락을 들고 터벅터벅 학교를 갔습니다. 누나가 따라오나 살피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누나도 안됐고, 엄마도 불쌍하고….'

이번 주일 우리 교회에서는 야외예배를 가기로 했습니다. 교회에서 가는 봄 소풍입니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위해 김밥도 준비하게 하지만 꼭 맨밥을 싸게 합니다. 나는 김밥을 지금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김밥보다 맨밥이 더 좋습니다.

어쩌다 밥상에 꽁치가 오르면 나의 유년시절 봄 소풍의 꽁치가 생각납니다. 요즘도 나의 어머니는 부식을 실은 차가 오면, 꽁치나 고등어를 사서 그걸 맛있게 구워놓고 전화를 하십니다.

“박 목사, 애들 학교에서 왔나?”
“아직 안 왔는데요?”
“넝쿨이나 은빈이 왔으면 이리로 보내요. 오늘 부식차가 왔길래, 내가 꽁치사서 맛있게 구웠어. 갖다 먹어요!”

봄 소풍과 꽁치는 나의 유년시절을 반추하게 하는 추억의 첫 단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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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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