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전 우리집 사남매(문숙 철 훈 헌) 키가 자로 그은 것 같습니다박철
바야흐로 꽃피고 새 우는 나들이하기 안성맞춤인 계절입니다. 이때가 되면 주말마다 나들이 길에 나선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젊은 선남선녀들은 꽃보다 화사한 연애를 꿈꾸고, 어린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어디 놀이동산이라도 놀러가자고 막 떼를 쓰겠죠.
모든 초등학교에서는 이미 봄 소풍 계획을 확정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40년 전, 나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동네에 초등학교가 있는데도 나와 누나를 화천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엘 입학시켰습니다. 화천 읍내에 있는 학교까지 장장 30리길을 통학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봄 소풍에 대한 계획을 아이들에게 설명하자 아이들은 교실이 흔들릴 정도로 환호를 하며 좋아했습니다. 40년 전의 일이니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이들에게 무슨 변변한 놀이감도 없었고, 지금처럼 공부나 각종 과외에 매달리는 일이 없어서 아이들은 입버릇처럼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을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한 달 전에 소풍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면 아이들은 손꼽아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 당시만 해도 봄 소풍을 가면 꼭 엄마들이 동행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소풍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을 하시다 그만두신 상태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시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셨고, 나의 어머니는 재봉틀을 돌려 간신히 굶지 않고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매우 빈한한 생활이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적당한 체념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아무리 떼를 써도 엄마한테는 안 통한다. 엄마는 우리를 위해 고생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봄 소풍을 간다고 해도 우리 어머니는 우리 남매에게 김밥을 싸줄 만큼 그런 삶의 여유가 없었고 어머니는 소풍에 따라 가실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며칠동안 엄마에게 졸라댔습니다.
“엄마! 이번에는 꼭 김밥 싸주셔야 돼요. 김밥 안 싸주면 나 소풍 안가요!”
강원도 화천 논미리, 육군 의무중대 앞에서 군복수선을 하며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노릇을 하셨던 어머니는 누나가 아무리 떼를 써도 묵묵부답이셨습니다.
드디어 소풍 가는 날 누나와 나는 새벽같이 일어났습니다. 학교엘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야 늦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누나가 어머니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엄마. 도시락!”
그러자 어머니 신문지로 둘둘 말은 사각 도시락 두 개를 부엌에서 갖고 나오셨습니다. 누나는 도시락을 받자마자 신문지 포장을 풀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습니다. 누나는 도시락을 마룻바닥에 집어던지고 마당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각 도시락 통 안에는 보리밥에 흰쌀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고, 네모난 반찬 통에는 꽁치 두 마리가 담겨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