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을 위한 동화> 토끼와 여우

등록 2003.04.28 15:25수정 2003.04.28 16:2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옛날 깊은 산골에 한 무리의 토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토끼들은 여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녀야만 했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자식들을 낳는 토끼들이지만 매년 수십마리가 여우에게 번갈아 물려 죽어 그 수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일정한 수를 유지했습니다.


토끼들은 이 세상에 여우만 없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토끼는 여우의 밥이었습니다. 이들 토끼에게 더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루하루 그저 여우의 침입이 없기만을 바라면서 연명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토끼 마을에 조그마한 변화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대로 능력을 떠나 연장자 순으로 촌장을 하던 그동안의 관습에서 탈피해 생존의 새로운 돌파구를 위해 젊고 신선한 촌장이 필요하다고 강력이 주장하는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토끼들도 연공서열을 무시할 뿐만아니라 관습을 파괴한 그를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토끼마을에 왜 변화가 필요한지를 역설하는 그의 끈질긴 노력에 한 두마리씩 동요하더니 점차 동조하는 토끼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토끼는 마침내 토끼들의 호감을 사 무리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새롭게 토끼무리의 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촌장에게서 보이던 권위와 부조리를 버리고 진정 토끼들과 함께 토끼가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반토끼들과 몸을 부딪치며 이곳저곳을 살피며 몸소 뛰기 시작했습니다.

토끼들은 그가 촌장이 된 이후부터 촌장이라는 말대신 진정 토끼들의 대장이라는 토장이라는 칭호를 붙여줬습니다. 부임한 이후 토끼 마을의 현안을 이것저것 챙긴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강력한 토끼왕국 건설을 기치로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을 천명했습니다.


그 대책의 일환으로 단기적으로는 마을을 튼튼히 하고 장기적으로 자손만대에 걸친 무궁한 생존을 위해 새끼가 태어나면 가혹할 정도로 혹독한 체력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뜀박질을 가장 강조했는데 토끼에게 뜀박질 훈련은 여우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선조들이 한번은 이렇게 살 수 없다며 힘을 모아 여우에게 달려 들였던 적이 있었지만 여우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에 크게 패하고 하마터면 멸종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몇몇 토끼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그나마 지금과 같은 수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토장은 그 전설을 되새기며 여우와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안으로 강력한 체력과 철저한 경계 태세만이 토끼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토장은 토끼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멀리 빨리 뛰는 토끼에게는 자신의 사비를 들여 평소에 먹기 힘든 신선한 풀을 상으로 선물했습니다. 또 여우의 동향을 미리미리 감지해 조직의 안녕에 기여한 토끼에게는 신선한 풀과 함께 보금자리도 제공해 주었습니다. 토끼들은 이러한 인센티브를 받기위해 저마다 열심히 체력과 청각을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토끼의 뒷발은 빨리 뛸 수 있도록 길이지고 귀는 미세한 소리도 감지할 수 있도록 커져갔습니다. 토장은 수시로 여우가 나타났을 경우 효과적인 대처요령에 대한 모의훈련과 불시 방문을 통해 경계태세를 점검했습니다.

토끼들은 그때부터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 되었습니다. 낮에는 스피드 강화를 위한 혹독한 훈련을 하고 밤에는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며 철저한 경계태세를 강화하다보니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수면이 부족해 눈은 발갛게 충혈되고 귀는 필요이상으로 커져버려 오히려 여우의 눈에 쉽게 띄는 부작용도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무리의 형태는 더욱 조직적으로 움직여 옛날 조상들처럼 그렇게 쉽게 여우에게 물려가는 경우는 줄어들었습니다.

여우는 이제 토끼 사냥이 어려워 예전처럼 토끼를 매일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냥을 나가 토끼가 눈에 보여도 번번히 실패하는 경우가 늘어가면서 굶어죽는 여우도 생겨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이 여우 목도리를 만들기 위해 여우를 마구 사냥하는 바람에 여우는 멸종의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숲속의 여우들은 사람들을 피해 다른 숲속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숲속에 토끼들은 자신들의 최대의 천적인 여우가 사라져 가자 너무 기뻤습니다. 사람들은 토끼는 돈이 안된다며 보고도 애써 잡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숲속은 토끼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토끼는 경계태세를 늦추고 체력훈련도 하지않고 풍부한 먹이를 마음껏 먹었습니다. 훈련과 경계태세를 늦추면 안된다는 토장의 얘기도 이젠 이곳 토끼들에게 한낮 공염불에 불과했습니다.

여우가 사라진 마당에 무엇하러 힘들게 훈련하고 잠도 못자냐며 토끼들은 토장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숲속의 토끼들은 토장을 제외하고 매일 먹고 자느라 몸이 비만해져 예전처럼 날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장은 다가올 위험을 대비하며 체력훈련과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토장은 언제나 튼튼한 체력과 녹슬지 않는 청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람들 사이에서 야생동물 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사냥이 금지 되었습니다. 사람의 발길 뚝 끊긴 숲속에 예전에 사람들을 피해 이곳을 떠났던 여우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숲속의 토끼들은 돌아온 여우의 모습에 무척 놀랐습니다.

여우를 보고 도망을 치려했지만 이제 비대해진 몸 때문에 도망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토끼들은 토장에게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토장은 예전처럼 체력을 강화하고 경계를 철저히 해야할 것이라 말했지만 한번 비대해진 몸과 무디어진 청각을 회복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우들은 적당히 살이 오른 통통한 토끼들을 마구 먹어버려 이곳 숲속에는 토장을 제외하고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런 근심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적당한 걱정과 긴장감은 오히려 삶을 지탱하게 하는 큰 힘이 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4. 4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