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19

선무곡의 위기 (4)

등록 2003.04.29 14:12수정 2003.04.2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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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시대 때,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패업(패業)을 도운 손무(孫武)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楚)나라의 병법가로서 오자(吳子)를 쓴 오기(吳起)와 더불어 병법의 시조라 불린다.

그가 쓴 손자(孫子) 모공편(謀攻篇)에는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아니하다[知彼知己 百戰不殆]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적의 실정은 모른 채 아군의 실정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며[不知彼而知己,一勝一負],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실정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만 번에 한 번도 이길 가망이 없다[不知彼不知己,每戰必貽]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이 대결이 실전(實戰)이었고 여옥혜에게 보타신법이 있다는 것을 몰라 철편교 신법을 사용하였다면 왕구명은 땅바닥에 누운 채 황천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땅바닥에 누운 그는 잠시 몸서리를 쳤다.

자신이 방금 죽음의 문턱을 지나칠 뻔하였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가까이 다가온 여옥혜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의 비무에서 누구든 부친을 모함한 자가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악랄한 수를 쓴 것만 같아서였다.


"아저씨! 미안해요."
"하하! 아닙니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탕 임금이 세숫대야에 적어 놓기를 오로지 매일 새로워지고, 매일매일 새로워지며, 그리고 또 날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고 적었다(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더이다. 아씨의 실력이 이렇듯 나날이 발전하여 이제 속하는 더 이상 당해낼 수 없을 듯하군요."

왕구명은 벌떡 일어나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그러면서 대학의 구절을 인용한 것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는 여옥혜의 검법이 이처럼 일취월장(日就月將)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던 터였다.

가문의 비전검법이 기록된 청룡검급을 보여준지 이제 불과 석 달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삼 년이나 그것에만 매달렸던 자신을 능가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검법의 정순함이나 변화의 현란함 등등 모든 면에서 자신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구명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감탄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질이 있기에 보타암의 수많은 여인들을 제치고 보타신니의 직전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옥혜는 끝내 무림천자성 정의수호대원이 되는 관문에는 도전해보지 못하고 보타암을 떠났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무공이 정의수호대원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다. 타고난 뛰어난 자질과 오성(悟性), 그리고 보타신니의 세심한 지도가 어우러졌으며, 거기에 피나는 노력까지 곁들여졌기에 실상은 다른 정의수호대원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화후에 올라 있었다.

여기에 상승절학인 청룡검법까지 추가되자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철들면서부터 오로지 청룡검법만 익힌 왕구명조차 감당할 수 없는 고수가 된 것이다.

사실 왕구명이 청룡검법 팔십일 초 전부를 익힐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여옥혜 덕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기에 이젠 구결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된 것이다.

"어때요? 이젠 가도 되겠어요?"
"아직 어림없습니다. 무천장에 있는 정의수호대원 치고 속하보다 약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럼 언제 가라는 말인가요? 영영 가지 말라고요? 아님, 이 다음에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가라고요?"

여옥혜는 오늘의 대결에서 자신이 이기면 무천장에 잠입하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하였는데 다른 소리를 하자 내심 화가 났다. 그렇기에 그녀의 표정은 약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 가긴 가되 우리의 불리함을 병법으로 극복한 후에 가자는 것입니다."
"병법이요…?"

"그렇습니다. 우린 둘 뿐이고, 무천장에는 많은 정의수호대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강자라는 것은 아씨도 알고 속하도 아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둘만으로는 그들 모두를 속이고 신임장주인 혈면귀수를 만나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

이 대목에서 여옥혜는 할말이 없었다. 왕구명의 지적대로 잠입하여 혈면귀수를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십육계 중 제십오계는 조호이산(調虎離山)입니다. 산 속의 호랑이는 무섭지만 평지에 내려오면 처치하기가 쉬운 법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우리는 혈면귀수가 스스로 장원 밖으로 나오길 기다려야 합니다. 다음에…"
"다음에…?"

"병법에 이르기를 강한 적은 분산시킨 후 각개 격파하는 제이계 위위구조(圍魏救趙)를 사용하여야 하나 우리 쪽이 워낙 약하니 이건 안 되겠고, 대신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을 정의수호대원들을 떼어버려야 합니다."
"어떻게요?"

"후후! 제육계인 성동격서(聲東擊西)를 사용하는 거지요. 동에서 소리치고 서를 공격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정의수호대원들을 유인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가 붙잡히면 어떻게 해요?"

"핫핫! 삼십육계 중 제이십구계인 수상개화(樹上開花)를 사용하면 쉽게 생포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상개화라면…?"

여옥혜는 내심 웃음이 나오려 하였으나 억지로 참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녀는 왕구명이 책만 읽으면 즉각 응용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는 품새로 미루어 엊저녁에 읽은 서책은 아마도 삼십육계를 읽은 모양이었다. 하여 말끝마다 구절을 인용하는데 그 뜻이나 제대로 아는지 궁금하여 짐짓 모르는 척하며 반문한 것이다.

"수상개화는 글자 그대로 나무 위에 꽃을 피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으음…! 가만 뭐더라…? 뭐였지…?"

말을 하던 왕구명의 음성은 점점 작아지다가 종래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본 여옥혜는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앗! 잠깐만요. 갑자기 배가 아파서…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왕구명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는 듯 부리나케 자신의 처소로 달려갔다. 이 모습을 본 여옥혜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해우소는 그쪽이 아닌데요?"
"헉! 그, 그런가요? 아, 알았습니다."

왕구명은 황급히 방향을 바꾼 후 삽시간에 전각 사이로 사라졌다. 이 모습을 본 여옥혜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마도 그는 삥 둘러서 자신의 처소에 갔다가 올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아는 척을 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호호! 아는 척하는 것도 병이라던데…'

왕구명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여옥혜는 상념에 잠겼다.

"으음! 아저씨의 말대로 혈면귀수만 끌어낼 수 있으면 좋은데 우리 둘만의 힘으로는 부족해.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여옥혜는 왕구명의 다음 생각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조호이산으로 끌어낸 후 성동격서로 정의수호대원들과 격리, 그 다음엔 미인계나 벽돌은 던져 옥을 얻는다는 포전인옥(抛 引玉)의 계를 사용하자고 할 것이다.

물론 미인계나 포전인옥를 사용할 때의 미끼는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신 혈면귀수를 정의수호대원들과 떼어놓기 위하여 그들을 유인하는 임무는 왕구명이 맡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왕구명이 말하려던 수상개화는 이쪽이 수적으로 밀린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허장성세(虛張聲勢)를 이용한 계책이다.

성공할 확률이 아주 없는 계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쪽에 어느 정도라도 있어야지 달랑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한 수법이다. 만일 잘못되면 왕구명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게다가 혈면귀수가 색을 밝힌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미인계에 넘어올지 여부도 문제이다. 넘어온다 하더라도 잘못되면 몸만 더럽히고 말 수도 있다.

이 순간 여옥혜는 스스로를 폄하(貶下)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낙척서생으로 역용한 이후 동경(銅鏡)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전에도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진가(眞價)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둘만의 힘으로는 안 돼! 뭔가 다른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해. 그리고 증거를 확보하려면 확실히 해야해. 그래야 아버님이 풀려나실 수 있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여옥혜의 상념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

같은 순간, 자신의 처소를 찾은 왕구명은 황급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난 밤 외웠던 것을 되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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