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20

선무곡의 위기 (5)

등록 2003.04.30 13:37수정 2003.04.30 14:06
0
원고료로 응원
"제일계부터 제육계까지는 만천과해(瞞天過海), 위위구조(圍魏救趙), 차도살인(借刀殺人), 이일대로(以逸待勞), 진화타겁(軫火打劫), 성동격서(聲東擊西). 좋아! 여기까지는 완벽하게 알고, 흐음! 제칠계가 뭐더라? 맞아! 무중생유(無中生有)! 그 다음은 암도진창(暗渡陳倉), 제구계는 격안관화(膈岸觀火)…"

왕구명이 삼십육계를 순서대로 모두 외우고 그 뜻까지 완벽하게 암기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두 시진이었다.


그러는 사이 뭔가를 생각해낸 여옥혜는 경장의 끈을 조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청룡무관을 떠나 천하제일문인 산해관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겨진 것이라곤 한 장의 첩지뿐이었다. 거기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 숙부님! 질녀는 우리 둘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녀 부친과 알고 지내던 분을 찾아 도움을 청하고 올 터이니 찾지 마십시오.
질녀 옥혜 올림 >


여옥혜는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왕구명을 숙부라 칭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향한 곳은 산해관 밖 인적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하여 나섰는지는 그녀만이 알 것이다.


* * *

"아, 안 된다고요?"
"그렇다. 너는 안 된다."
"왜, 왜요……?"


잔뜩 기대했다가 맥이 풀려버린 장일정은 말을 더듬기까지 하고 있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천뢰도에서 만년뇌혈곤의 내단을 취한 일행은 그곳에서 석 달이나 더 있었다. 천혜의 신단(神丹)이 될 북명신단(北溟神丹)을 제련하기 위함이었다.


그 석 달 동안 장일정과 반광노조는 단 한번도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뱀으로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옥접만은 그렇지 못했다.

여인의 몸인 그녀가, 그것도 이제 방년(芳年)의 나이를 갓 지낸 그녀가 어찌 징그러운 뱀을 먹을 수 있겠는가!

하여 그녀가 먹을 생선을 낚느라 반광노조는 매일 고생을 하여야 하였다. 천하제일 낚시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그는 매일 와류와 와류 사이를 뚫고 나가 고기를 낚아야 했던 것이다.

웬일인지 천뢰도 부근에는 고기가 한 마리도 없기 때문이었다.

장일정이 천뢰도에서 북명신단을 제조하기로 마음먹은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연단을 방해할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반광노조가 천뢰도에 있는 이상 이제 그곳에 올 능력을 지닌 사람은 전무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단이 제련되는 동안 그것을 방해할 사람이 전혀 없기에 더없이 안전하였다.

둘째는 만일의 경우 양기를 대신해줄 독물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이다. 극음의 성질을 지닌 만년빙극설련실의 음기는 어쩌면 만년뇌혈곤의 내단으로도 중화시키기 부족할 정도일지도 몰랐다.

만일 제련 도중에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으면 즉각 부족한 쪽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주지 못할 경우에는 둘 다 못 쓰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독사의 독은 대부분 양의 기운을 띄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천뢰도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이런 예상은 적중하였다. 결국 삼천여 마리에 달하는 독사들을 희생시킨 후에야 드디어 북명신단의 제련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제련이 마쳐진 날 장일정은 북녘 하늘을 우러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사부의 목숨이 바쳐졌다는 것을 상기한 것이며, 이제 사부의 원수를 갚을 발판을 마련하였기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이었다.

북명신단은 즉각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든 함 속에 소중하게 갈무리되었다. 그가 이것을 즉각 복용하지 않은 것은 상승 내공심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살아 생전 북의는 내공심법을 모르면 신단 효능을 완벽하게 흡수할 수 없으므로 절대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하였다. 이를 잊지 않았기에 복용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연단이 마쳐진 직후 천뢰도를 떠났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다는 호옥접의 채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뢰도를 떠난 일행은 곧장 뭍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신선도(神仙島)라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어찌나 작은지 한 시진만 돌아다니면 섬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섬의 명칭은 반광노조가 붙인 것이라 하였다.

십수 년 전, 어느 날 그는 고기를 잡다가 갑작스런 폭풍우를 만났다. 그때는 어찌나 비바람이 거센지 도저히 어로(漁撈)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무인도인 이 섬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엄청난 폭풍우를 뚫고 솟구치는 인영 하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무인도인줄 알았는데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괴인영은 한 자루 장검을 들고 검무(劍舞)를 추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검무가 아니었다. 장검이 한번 떨쳐질 때마다 아름드리 고목이 베어졌으며, 집채만한 바위가 갈라졌다.

생전 처음 이러한 모습을 본 반광노조는 너무도 놀라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냈다.

잠시 후 그의 앞에는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를 뚫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젖어 있지 않았다.

우산을 쓴 것도 아니건만 한 방울의 빗물도 닿지 않은 것이다. 잠시 후 노인은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이날 이후 반광노조는 이 섬을 신선도라 불렀다. 자신이 신선을 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북명신단을 제련하는 동안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장일정은 반광노조가 말하는 노인이 어쩌면 무림의 고수일 것이라 생각하고 이곳으로 향하자고 하였다.

그 결과 신선도에 당도하였고 반광노조가 보았다는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신선이라던 노인은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사(奇人異士) 가운데 하나였다.

노인은 이름은 잊었다면서 스스로를 동해무치(東海武癡)라 불러달라 하였다. 그는 한 마디로 무공에 미쳐 오로지 무공 연마로 일평생을 보내느라 자신의 성명 석자조차 기억 못 한다 하였다.

어린 시절 사부의 손에 의하여 섬에 온 이후 한 번도 섬을 떠나본 적이 없다 하였다.

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공 이외에는 관심이 없기에 굳이 다른 곳으로 나가볼 생각조차 않은 것이다.

장일정은 그에게 사부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하지만 동해무치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껏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홀로 잘 지내왔는데 이에 와서 번잡스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북의와 남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읍소(泣訴)를 거듭하였다. 호옥접도 거들고 나섰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동해무치는 결국 장일정을 제자로 받아들이는데 동의하였다. 하지만 장일정은 곧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하였다.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지 여부를 알아본다면서 진맥하던 동해무치가 북명신단을 복용할 수 없는 몸이라 단언한 것이다.

"왜죠? 왜 제자가 북명신단을 복용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건, 네 신체 때문이니라."

"제자의 신체 때문이라니요?"
"네 가슴에 손을 얹어 보면 알게 될 것이니라."

"가슴에 손을 얹어요?"
"그래, 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심장이 우측에 있느니라. 때문에 신단을 복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에…?"
"세상의 모든 심법은 좌측에 심장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너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느니라."
"제자의 심장이 우측에 있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허억!"

사람은 누구나 좌측에 심장이 있다. 이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일 것이다. 하물며 천하제일의라 일컬어지던 북의와 남의의 공동제자인 장일정이 어찌 이러한 사실을 모르겠는가!

따라서 한번도 자신의 심장이 우측에 있을 것이라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던 그는 동해무치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려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대경실색하였다.

마땅히 맥동(脈動)이 있어야 할 부위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대신 다른 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내, 내가 우흉심(右胸心)이었단 말이야…?'

가슴에 손을 얹은 장일정의 안색이 돌변하자 곁에 있던 호옥접 역시 대경실색하였다.

"사, 상공, 정말 우흉심이에요?"
"으으!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장일정은 너무도 놀라 더듬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탕약에 있어 천하제일인이었던 북의와 침술에 있어 천하제일인이었던 남의가 공통적으로 말하길 대략 이천여 명에 하나쯤은 오른쪽에 심장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모르는 이유는 진맥을 할 때 맥문(脈門)만을 짚어보기 때문이라 하였다. 심장이 어디에 있던 맥동이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모르고 지난다는 것이다.

우흉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심장만 좌측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장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장기 역시 반대쪽에 달려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진맥한 장일정은 심장만 좌측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반대라면 심법을 운용할 때 이를 감안하면 되지만 심장만 우측에 있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해무치의 말대로 무공을 아예 익힐 수 없는 몸인 것이다.

"이럴 수가…! 내가… 내가 우흉심이라니…"
"너는 내공은 익힐 수 없으나 외공을 익히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따라서 정히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외공을 전수해주마.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북명신단은 복용할 수 없구나."
"으으으…! 으으으으…!"

장일정은 한번도 상상조차 못해본 상황과 조우하자 너무도 어이없기에 신음성만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놀라기는 호옥접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인의 몸이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장일정의 가슴을 짚어본 그녀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명한 우흉심이었다. 따라서 이제 원수를 갚을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4. 4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5. 5 "10만4천원 결제 충분히 인식"... 김혜경 1심 '유죄' 벌금 150만원 "10만4천원 결제 충분히 인식"... 김혜경 1심 '유죄' 벌금 150만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