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섬에는 꼴찌가 첫째 된다

새치기 한다고 열 받을 것 없느니라

등록 2003.04.30 07:40수정 2003.04.3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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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차를 가득 실었다. 꼴찌가 첫째되는 배이다.
배에 차를 가득 실었다. 꼴찌가 첫째되는 배이다.박철
교동에 처음 와서 제일 재미있는 일 중에 하나가 차를 배에 싣는 것이었습니다. 배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 엿장수 맘대로 입니다. 요즘처럼 1분1초도 다투며 모두 ‘바쁘다! 바쁘다!’를 외치며 돌아가는 판에, 배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배에 실을 차가 어느 정도 모여져야 배가 움직입니다.


지금은 물때와 상관없이 배가 수심이 깊은 골을 따라 돌더라도 다니게 되었지만, 전에는 물때에 걸리면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물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배 시간이 없다는 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파격’(破格)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도심지를 질주하다 신호등에 걸려 모든 차가 멈췄다가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는데 앞차가 잠시만 멈칫거리면 클랙슨을 울리고 난리가 납니다.

“저 멍청한 사람 봤나! 파란불 인데 안가고 뭐해!”

배에서 창후리를 내다보며. 갈매기가 같이 가자고 따라온다.
배에서 창후리를 내다보며. 갈매기가 같이 가자고 따라온다.박철
거친 욕설이 난무합니다. 과속하지 말고 안전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속도를 줄이면 수시로 끼여들기를 합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단 1분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여하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지까지 빨리 가기 내기입니다.

내가 운전을 배운지 몇 달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차선이 하나 밖에 없는 도로를 규정 속도로 달리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라이트를 깜박거립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클랙슨을 울립니다. 나는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창문에서 손을 빼서 막 찌르는 시늉을 하길래 그때서야 감을 잡았습니다. 비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조금 늦게 판단하고 비켜주었더니 내 차를 금방 앞질러서 저만치 차를 세우더니 내 차가 지나가기 전에 나보고 차를 세우라고 손짓을 합니다. 그 사람 눈에는 불이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험악하게 인상을 쓰면서 한다는 말이

“여보시오. 운전을 그렇게 밖에 못해!”


박은빈.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기 직전. 아빠 나 이쁘지요?
박은빈.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기 직전. 아빠 나 이쁘지요?박철
하면서 주먹이 차창 안으로 날라 올 기세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었었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사람이 왈, 바쁜 세상에 차가 그렇게 천천히 가면서 앞을 가로 막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시방 세상은 자동차 규정속도를 지키는 것이 바보가 되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가느냐?’ 하는 속도와의 전쟁입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얼마 밖에 안 걸렸다’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급합니다. 급하다보니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사고’(思考)는 정지되고 약삭빠른 요령과 처세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고속도’와 ‘일등’이라는 굴절된 삶의 스타일이 몸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빨리 가서 뭐 하느냐?’ 빨리 집에 가서 고작 신문이나 TV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동에 왔더니 전혀 다른 세계, 다른 감각입니다. 한 시간 이상 기다리는 게 보통입니다. 그렇게 느긋할 수가 없습니다. 섬 문화가 전체적으로 사람들을 느긋하게 만들어주었고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빈배가 바다에 떠 있다. 아무 할일이 없으니 심심하겠다.
빈배가 바다에 떠 있다. 아무 할일이 없으니 심심하겠다.박철
또 하나의 파격은 차를 배에 실을 때에는 먼저 온 순서대로 싣지만, 배에서 내릴 때에는 거꾸로 맨 나중에 실은 차부터 내린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꼴찌로 온 사람이 제일 먼저 내려갑니다. 세상에 이렇게 불합리한,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먼저 배에 실은 차가 나중에 내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차를 먼저 싣겠다고 차를 안쪽으로 대려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먼저 타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차를 먼저 실었다고 좋아할 것도 아닙니다. 새치기 한다고 핏대 올릴 필요도 없습니다. 좀 느긋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익숙하지 않아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이렇게 통쾌한 역설이 어디 있겠는가? 무릎을 치게 되었습니다. 꼴찌로 탄 차가 일등으로 내리고 일등으로 탄 차가 꼴찌로 내린다는 것에 아무도 불만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차를 배에 실을 때에는 후진으로 꽁무니부터 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운전 실력이 단박에 드러납니다. 후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안내요원들에게 야단을 맞기도 하고, 후진으로 차를 실어야 하니 매우 조심운전을 해야 합니다.

2002년 배위에서. 목사님 사진 한장 찍어 주세요.
2002년 배위에서. 목사님 사진 한장 찍어 주세요.박철
무엇이든지 1등과 일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꼴찌가 1등이 되는 파격이- 이러한 역설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통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집 가족 홈페이지 ‘느릿느릿 이야기’의 ‘느릿느릿’(slow slow)도 이런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싶습니다. 시방 그대는 꼴찌가 1등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순리로 받아들일 만큼의 넓은 도량(度量)을 갖추고 있습니까?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누가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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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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