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찰께서 오셨으니 쇤네들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어라? 그대들은…?"
이회옥은 왜 자신의 처소에서 분타주의 시중을 들어주는 시비들이 있었는지 의아하였다. 하지만 묻기도 전에 그녀들은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흐음! 아무도 없는 데를 뭐하러 왔었지?"
처음 부임하였을 때 이회옥에게는 네 명의 시비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음식과 침선, 그리고 잠자리와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시비들이라 하였다. 모두 선무곡 여인들이었다.
분타주는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품어도 좋으며 심지어는 생사여탈 또한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다시 말해 말을 안 들으면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회옥은 이를 거절하였다.
여인들과 함께 생활한 적이 없어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사람이 사람을 부린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잠자리도 스스로 보았고, 의복에 구멍이 나면 스스로 꿰맸다. 하지만 한가지 귀찮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음식이었다.
스스로 해먹자니 너무도 귀찮아 시비 하나를 남기려다가 이내 포기하였다. 하나가 있으나 넷이 있으나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며, 그녀를 부리는 것이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끼니때가 되면 가까운 객잔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철마당 제일향 소속일 때에는 한 달에 은자 다섯 냥이 지급되었지만 선무분타 순찰이 된 이후에는 오십 냥이 지급되었다. 따라서 재정적인 부담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이회옥의 거처는 그야말로 황량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이다. 직급이 순찰이니 전각 한 채 모두를 쓰게 되어 있다. 하지만 사용하는 것은 정실 하나뿐이다.
그나마 잠을 자거나 독서를 할 때 이외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주어진 본분을 잊지 않고 말들을 보살피느라 주로 마구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회옥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마구간에는 네 명의 정의수호대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들의 임무는 대완구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이외에도 하인 아홉이 배속되어 있다. 그들은 말에게 먹일 건초를 구해오고, 마구간 청소와 말을 목욕시키는 등 허드레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회옥은 지시만 하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말들과 있는 시간이 좋아서였다.
어쨌거나 이런 연유로 이회옥이 사용하는 정실에는 투박스런 침상 하나와 책상 하나뿐이었다. 의자도 없어 책상을 침상 가까이 끌어다 놓고 거기에 걸터앉아 책을 본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읽고 있던 몇 권의 서책뿐이다. 그야말로 도둑이 들어도 훔쳐갈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흐음! 이상하군. 어라?"
시비들이 왜 자신의 처소에서 나왔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회옥은 정실의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후후! 이래서 그런 말을 한 것이군. 흐음! 좋은데?"
황량하기만 하던 정실의 내부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원래 있던 집기들은 모두 사라졌고 대신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품격 높은 집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바닥은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침상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천으로 만든 두툼한 휘장까지 쳐져 있었고, 탁자에는 문방사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사방 벽에는 그림이나 글씨가 있는 족자들이 걸려 있었고, 정실 한쪽에는 새로 가져다 놓은 오동나무로 만든 서가(書架)에는 서책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신을 비출 수 있는 동경(銅鏡)도 있었고, 새로 지은 의복들도 걸려 있었다. 또 다른 탁자에는 먹음직스런 음식이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질 좋은 술이라도 가져다 놓았는지 달콤한 주향까지 풍기고 있었다.
마구간만도 못하던 곳이 천자 부럽지 않을 만큼 호사스런 곳으로 변모해 있었다. 한마디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바뀐다는 능곡지변(陵谷之變)이나, 높은 언덕이 무너져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언덕으로 변한다는 고안심곡(高岸深谷)이 된 것이다.
유정지(劉廷芝)는 이런 것을 대비백발옹(代悲白髮翁)이라는 싯귀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洛 陽 城 東 桃 李 花
飛 來 飛 去 落 誰 家
洛 陽 女 兒 惜 顔 色
行 逢 女 兒 長 嘆 息
今 年 花 落 顔 色 改
明 年 花 開 復 誰 在
景 聞 桑 田 變 成 海
낙양성 동쪽의 복숭아꽃 오얏꽃
이리저리 날아 뉘 집에 지는가
낙양의 어린 소녀 고운 얼굴이 아까워
지는 꽃 바라보며 한숨짓누나
올해 꽃이 지면 그 얼굴에 나이를 먹어
내년에 피는 꽃은 누가 보려나
뽕나무밭이 바다가 된다는 건 옳은 말이네
"우와! 정말 대단하군."
이회옥으로서는 평생처럼 맞이하는 호사(好事)였기에 집기들을 일일이 만져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나지막한 신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읍! 으으으읍!"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누가 다쳤나? 어디서 나는 소리야?"
정실의 문을 열고 밖을 살핀 이회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으응? 이상하다? 어디서 난 소리였지? 잘못 들었나?"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자 이회옥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문을 닫았다. 이때 또 다시 소리가 들렸다.
"으으읍! 으으으읍!"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어디 누가 쓰러져 있나?"
이회옥은 정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전각의 문을 일일이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전각 앞 마구간까지 샅샅이 뒤졌다.
지금은 대완구들을 운동시키는 시간이다. 따라서 정의수호대원과 하인 모두 따라나가 아무도 없을 시간이다. 그러므로 마구간에는 아무도 있을 리가 없다.
이회옥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섰다. 분명 무슨 소리인가를 들은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내가 귀신에 홀렸나?"
정실로 돌아온 이회옥은 손으로 귀를 툭툭 쳤다. 귀에 이상이 생겨 이명(耳鳴)현상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이다. 이때 또 다시 소리가 들렸다.
"으으읍! 으으으으읍!"
"이런 젠장!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벌컥―!
이회옥은 또 다시 전각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전각과 마구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후로도 이런 과정이 서너 번이나 반복되자 이회옥은 은근히 짜증이 났다. 그런데도 소리는 여전하였다.
"으으읍! 으으으읍!"
"어휴! 대체 누가 이런 장난을 하는 거야? 누구야? 어디에 있어? 왜 이런 장난을 하는 거야? 누구야? 어서 안 나와?"
이회옥은 누군가가 자신을 놀리려고 장난하고 있다 생각하자 슬며시 화가 났다.
"누구야? 장난하지 말고 이제 나와. 응? 대체 누구냐니까? 어서 안 나와! 계속 이러면 성질 낸다. 어서 나와!"
말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리자 이회옥은 짜증을 내며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그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화가 난 그는 거친 손길로 침상을 가리고 있던 휘장을 걷어냈다.
침상이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 이회옥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헉!"
그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떠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 역시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크게 벌어진 채 다물어 질줄 모르고 있었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 때문이다.
하지만 굳어있던 순간은 불과 일수유뿐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이회옥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그대로 돌아섰던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눈 깜짝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회옥이 본 것은 너무도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방금 전 그가 본 것은 그의 뇌리에 그대로 각인되고 있었다.
신음소리의 근원은 바로 분타주가 새로 장만해 준 침상이었다. 그런데 침상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신이 된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활개를 벌린 채 묶여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목과 발목을 묶은 부드러운 천은 침상 귀퉁이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는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재갈이 물려있었다. 그렇기에 신음 같은 소리밖에 낼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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