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되었건 이회옥은 조연희가 싫지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나 좋았다.
사실 그녀를 처음 만나고 온 날 어찌나 마음이 설레는지 밤새 한 잠도 못 자고 전전반측(輾轉反側)을 되풀이하지 않았던가!
그 후로도 매일, 잠들 무렵이면 그녀의 아름다운 영상을 떠올렸다가는 이내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곤 하였다.
자신이 위대한 전사의 후예이기는 하나 현재로서는 천애고아이다. 게다가 적어도 다향루에 관계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무림천자성 사람이다. 그렇기에 조관걸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가 누구이던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다.
따라서 현 상황이 아무리 다급하다 할지라도 그의 허락 없이는 절대 그녀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인 이상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마음도 모르는 일이다.
만일 자신만 좋아하고 그녀가 아무 생각이 없는데 강제로 범해버리면 곧바로 치한이나 강간범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젠장! 이럴 땐 어떻게 하지? 으으음!'
황급히 자신의 처소로 향하는 동안에도 이회옥은 취해야 할 행동을 정하지 못한 채 심한 갈등에 젖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젠장, 왜 이렇게 일이 꼬여? 아, 맞다! 혹시 그러면… 좋아, 마구간으로 먼저 가보자.'
자신의 처소에 거의 당도하였을 무렵 이회옥은 섬전처럼 스치는 상념에 곧장 마구간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대완구 두 마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이회옥은 수놈에게는 질풍(疾風)이라는 이름을, 암놈에게는 노도(怒濤)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그래서 둘을 한꺼번에 부를 때에는 그냥 질풍노도(疾風怒濤)라고 불렀다. 그만큼 빠르기에 붙인 이름이다.
무림천자성 철마당에 있는 일천이백여 대완구 가운데 이들 둘을 골라낸 것은 비룡만큼이나 빠른 망아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암수 한 쌍 모두가 빠르면 그 사이에서 얻어지는 망아지 역시 빠를 것이다. 호부(虎父)에는 견자(犬子)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망아지의 이름을 벌써 지어둔 바 있었다. 암놈이건 수놈이건 놈의 이름은 섬전(閃電)으로 지어졌다. 섬전처럼 빨리 달리라는 의미였다.
말들은 보통 새끼를 한 마리만 낳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 쌍둥이를 낳기도 한다. 이때를 대비하여 지어놓은 이름 하나가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격렬한 우레라는 뜻의 신뢰(迅雷)였다. 섬전과 마찬가지로 빨리 달리는 말로 성장하라는 의미였다.
"헉! 순찰께서 이 시간에 웬일로…?"
"그, 근무 중 이상 무!"
한참 마작(麻雀) 패를 섞고있던 정의수호대원들은 이회옥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현재 둘이 한 짝을 이뤄 교대로 근무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둘은 비번이고, 나머지 둘은 현재 근무 중인 셈이다.
마작은 분명 도박이다. 그리고 무림의 모든 문파가 그러하듯 무림천자성 역시 근무 중에 도박은 절대 금지되어 있다.
만일 이를 어기고 근무 중에 도박을 하다 적발되면 삼십 대의 장형(杖刑)에 처해지고, 한 달간 하옥된다.
어떤 사람은 도박 한번 했다고 한 달씩이나 하옥시키는 것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삼십 대의 장형에 처해지면 일어나서 제대로 걷기 시작하는 데만 거의 한 달이 걸리기 때문이다.
형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도박을 하다 적발되면 매번 반년씩 근무연한이 늘어난다.
근무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정의수호대원들에게 있어 그것은 가히 지옥에서 처해질 법한 형벌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누가 있어 자유를 싫어하겠는가!
무림의 정의를 수호하는데 앞장서는 정의수호대원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한다. 게다가 상명하복이 철저한 곳이다 보니 하급자는 하루종일 상급자의 수발을 들며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한시바삐 진급하기 위하여 매일 매일 무공 수련에 열중하여야 하기에 밤만 되면 쓰러져 자기 바쁠 정도가 된다. 그나마 근무경력이 늘어 이력이 좀 붙어야 요령도 피우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세인들의 존경과 흠모보다는, 그리고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악인을 처단한다는 자긍심과 보람보다는 무엇이든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더 좋은 법이다.
따라서 정의수호대원에 임명되는 그 날부터 언제 임무를 마치고 귀향할까 날짜를 세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런 판에 무려 반년이나 늘어난다면 어떤 기분이 되겠는가!
그렇기에 정의수호대원들은 마치 한 겨울에 얼어붙은 동태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은 이제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지 누렇게 떠 있었다.
"흠! 넷이서 마작을…? 근무 중일 텐데?"
"그, 그게 말입니다. 소, 속하들이…"
"아이고, 한번만 봐 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이회옥은 정의수호대원들의 아랫도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보며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근무수칙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좋아! 한번 봐주지. 대신 앞으로는 이래서는 아니 될 것이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순찰이 최고이십니다."
"좋네! 자네들을 믿겠네. 그건 그렇고 지금 즉시 질풍노도의 안장을 얹게. 잠시 후 야간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네. 준비하는데 정확히 반각을 주겠네. 알겠는가!"
"조, 존명! 야! 뭐해. 어서 안장 얹어!"
"그, 그래. 알았어. 야, 너희들도 빨리!"
평상시 정의수호대원들은 자신들보다 나이 어린 이회옥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하여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 외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하인들을 불러 시켜도 될 일을 스스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하옥되고 근무연한이 늘어날 것을 봐줬으니 안 그러면 사람도 아닐 것이다. 그들이 한바탕 수선을 피우는 동안 이회옥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있었다.
"지금 즉시 이곳을 떠나야 하오. 헌데 말을 탈줄 아시오?"
"말이요? 그건 아는데 왜요? 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벌써 구하신 거예요? 지금 어디 계시지요?"
"아니오. 어르신이 어디 계신지는 알아 볼 수가 없었소."
"그런데 왜 말을…?"
"지금 즉시 여길 떠나야 하기 때문이오."
"예에? 왜요? 왜 여길 떠나요? 안 돼요. 아버님을 구해주세요. 흐흑! 뭐든지 다 할 게요. 그러니 소녀의 아버님을 구해 주세요."
"낭자!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소. 그러니 어서 따라 오시오."
"싫어요! 소녀는 못 가요."
이회옥의 애타는 마음을 전혀 모르는 조연희는 부친을 구하기 전에는 절대 갈 수 없다는 듯 펄쩍 뛰었다.
"낭자!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소. 빨리 여길 나가지 않으면…"
"싫어요. 소녀는 아버님을 구해내기 전에는 절대 갈 수 없어요. 여기 계신걸 뻔히 아는데 자식된 도리로 어떻게 그냥 가요? 지금쯤 모진 고초를 겪고 계실지도 몰라요. 그런데 어찌… 그러지 말고 공자님이 아버님을 구해 주세요. 예?"
"낭자! 지금은 안 되오. 그러니 어서 갑시다."
"싫어요! 안 가요! 아니, 못 가요!"
조연희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리고 웬만한 말로는 따라 나서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이었다.
마음이 점점 급해진 이회옥은 내심 화가 났다. 지금 이 위기가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이런 젠장! 급해 죽겠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왜…?'
조연희는 끌려갈 수 없다는 듯 침상 기둥을 끌어안고 있었다.
"낭자! 지금 안 가면 내가 낭자를 겁탈해야 한단 말이오. 그러니 어서 갑시다."
"싫어요! 소녀는 못 가요. 차라리 소녀를 겁탈하세요. 대신 아버님을 구해 주세요."
'이런 젠장! 말로는 도저히 안 되겠군.'
이회옥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조연희가 미워졌다. 차라리 여느 호색한처럼 그냥 겁탈해버리면 모든 것은 끝이다.
그후로도 색노(色奴) 다루듯 하면 분타주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계집이라고 하면 돌려달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간을 번 뒤에 천천히 조관걸을 구해낼 방도를 찾아보는 방법도 있다. 하여 그냥 겁탈할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맨 정신에는 도저히 할 짓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자고 타인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조관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에구 에구, 이 어리석은 여자야!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절대 침상 기둥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끌어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조연희를 바라본 이회옥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어휴…!'
이때였다. 정실 밖에서 정의수호대원의 보고가 있었다.
"순찰! 모든 준비가 마쳐졌음을 보고합니다."
"좋소! 지금 즉시 질풍노도를 이리 끌고 오시오."
"존명!"
질풍노도를 끌고 오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가 싶어 고개를 든 조연희를 본 이회옥은 문가에 세워 둔 장봉(長棒)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틈날 때마다 봉술을 연마하려고 구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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