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땅에 묻힌 억울한 죽음의 진실

한국전쟁중 100만명 희생... 1살바기가 학살기록엔 '공비'

등록 2003.05.09 03:15수정 2003.05.0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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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푸른 나무들이나 우거지고
고운 꽃들이나 피어있을 일이지
저것이 무언가
씨앗도 아니고
작은 돌멩이도 아닌
저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산 꽃에 취해 있을 때
허공을 향해 뻗은 푸른 나무에 기대어
그저 멍하니 있는 나에게
묻혀있던 이빨들이 달려나와
나를 몰랐느냐고
왜 나를 부르지 않느냐고
긴 세월 너무 추웠노라고
따닥거리며 내 발목을 물어뜯는다.

이보다 더한 소름 돋침은 없다
이보다 더 피 솟구치는 원한이 어디 있단 말이냐

고봉밥 뚝딱 해치우고 논일 나가던 아저씨의 이빨
소 꼴 베다 풀피리 꺾어 불던 총각의 이빨

말없이 수줍어 보일 듯 말 듯하던 처녀의 고운 이빨
젖니도 다 안 빠진 개구쟁이 아이의 여리던 이빨
모두 깨지고 부서져 내리던
피투성이 그 밤의 아우성이 들린다

그 곳의 풀들이 피를 뒤집어쓰고 숨죽여 울고
선 나무들이 오금 저리게 벌벌 떨던
달도 없는 칠흑의 밤에
총과 칼과 몽둥이만 미친 듯이 춤추던
그 밤 비명소리가 들린다

햇살 고이 내리는 금정굴
오십 년 전 그 이빨들이
깊은 땅 저 밑에서 불끈불끈 솟아 나와
이제 침묵을 그만 끝내겠노라고
아우성치며
우우 소리치며
하얗게 하얗게
꽃으로 피어난다.


- 아마추어 시인 제비꽃의 '산에 핀 이빨 꽃' 중에서 -


문경, 여수, 거창, 제천, 하동, 단양, 익산, 제주, 해남, 진주, 정선, 김제, 밀양, 평창, 김천, 부안, 청주, 순천, 영월, 창녕, 보성, 고양, 함평, 포천, 화순, 충주, 함양….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해 무차별적으로 벌어진 집단학살에 의해 민간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지역들이다.


전국 30여개 유족회 및 시민단체로 구성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는 당시 전국 100여곳에서 국군과 경찰, 우익청년단체, 미군에 의해 이루어진 대량학살로 100만명 가까운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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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양민학살...그리고 매장  양민을 학살하여 구덩이에 파묻는 이같은 끔찍한 일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1948년에서 1953년 사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양민학살...그리고 매장
양민을 학살하여 구덩이에 파묻는 이같은 끔찍한 일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1948년에서 1953년 사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 범국민위원회

화순군의회 양민학살진상조사특별위원회 김성인 의원에 따르면 화순군 남면 다산마을 청년 23명은 "공화국 소속 동복하씨가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1950년 11월 17일 저녁 6시경 마을회관과 마을 앞 논에서 11사단 20연대 1개 중대장 육군소위 장현수 소속 국군들에 의해 집단사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1949년 12월 24일(음력 11월 15일) 낮 12시 경북 문경 석달마을. 24가구 127명의 주민이 살고 있던 이곳에 무장군인 70여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대접이 소홀하다는 트집을 잡으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당시 마을에 있던 전체 주민들을 마을 앞 논바닥과 마을 뒤산에 모아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들은 1차 학살을 끝내고 산 사람을 향해 재사격을 가하여 확인사살까지 한 다음 떠났다.

2시간 동안 벌어진 이날 학살극에서 희생된 주민 86명 중에는 5세 미만의 어린이 11명을 포함해서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32명이었으며,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자가 42명이었다. 특히 이 중에는 '황아기' '남아기' '채아기' '정아기' 등 이름도 짓지 않은 1살짜리 젖먹이가 네 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의 사망 원인에는 '공비'로 되어 있다. 법 제정이 왜 필요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범국민위원회 소속 유족들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지난 2월 27일 이후 72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지난 2일에는 법 제정 촉구 농성에도 묵묵부답인 국회를 규탄하고 억울하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해원굿이 국회 앞에서 펼쳐졌다. 곳곳에서 유족들의 오열이 이어졌다.

a 지난 2일 국회 앞에서 벌어진 해원굿 도중 망자의 혼이 깃든 만신이 유족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전하는 '뒷영실' 대목에서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유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국회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지난 2일 국회 앞에서 벌어진 해원굿 도중 망자의 혼이 깃든 만신이 유족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전하는 '뒷영실' 대목에서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유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국회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 범국민위원회

이같은 유족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국회와 중앙정부에서는 '니 탓 내 탓' 타령만 하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2001년 9월 김원웅 의원(개혁국민정당)의 대표발의로 여야의원 48명의 서명을 받아 '민간인 희생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국회는 손도 안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사항이기도 한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지난달 3일 제주 4·3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고건 총리에게 대책마련을 지시했지만 정부는 한 달이 넘도록 대책위원회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기도의회, 전북도의회, 경북도의회 등 지방의회가 민간인학살에 대한 실태 파악을 위한 조사위를 구성하는 등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과는 달리 중앙정부의 소관부처인 행정자치부에서는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고 있어 법 제정을 더욱 더디게 하고 있다.

범국민대책위는 오는 6월 임시국회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특별법안'에 대한 심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설득하는 한편 대국민 홍보활동도 강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범국민위원회 이창수 상황실장은 "좌익이 아닌데도 연좌제에 묶여 지난 반세기 동안 유족들은 사회활동도 제대로 못하고 주눅들어 살아 왔다"며 "50년 넘게 기다려왔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실장은 "가해자 집단인 국방부와 경찰청 등의 반대로 정부입법으로 발의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며 "국회가 법 제정에 적극 나서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그런 다음 정부조직과 무관한 객관적이고 실효성 있는 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실장은 또 '당시 경찰과 군인들도 인민군에 의해 대량 학살됐다'는 일부 우익단체의 주장에 대해 "인민군이 경찰과 국군을 죽인 것과 아군인 국군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과는 다르다"며 "당시 인민군에 의해 희생된 25만명의 유가족들은 현재 보훈사업 등을 통해 생활을 하고 있지만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80% 정도가 농민이고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국무조정실의 한 관계자는 "정부에서도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검토는 하고 있지만 명확히 결정된 것은 없다"며 "관련 법령 등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법률안이 있고 입법청원만 십여건이 넘는다. 국회에서 먼저 검토와 논의를 하여 법률을 제정하면 정부는 이에 따르는 것이 그 동안의 관례였다"고 말했다.

a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회는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절규와 호소를 외면하고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회는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절규와 호소를 외면하고 있다 ⓒ 석희열

이에 대해 국회 행자위 간사 이병석 의원실(한나라당)은 "관련 부처와의 조율을 거쳐서 법안을 심의하고 상정하는 게 국회의 오래된 관행"이라며 "그러다보니 법안 심의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는 것 뿐이지 관심이 없거나 사안의 중요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행자위 민주당 간사 전갑길 의원 비서실은 "관련 법안을 작년 10월 행자위에서 건의문 형식으로 국회 운영위로 넘겼지만 받지 않아 현재 행자위에 계류 중"이라며 "법안 자체가 작은 사안이 아니고 막대한 국가예산이 소요되므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국회에서 활발히 논의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임종석 의원은 "이 사건은 우리 모두가 나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인 불행이며 국가가 책임져야 할 과제"라며 "국회가 책임있게 논의하고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여 희생자들의 50년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범국민위원회는 8일 한국전쟁 당시 김천교도소에서 학살된 뒤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민간인들의 유골을 상당수 발굴했다고 전하고 앞으로도 현지인의 증언을 토대로 유골 발굴작업을 계속 해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범국민위원회는 22일 국회 앞에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한 1천여명 규모의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이다. 또 29일에는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고 유족들의 억울함을 위로하기 위한 서울대 이애주 교수의 해원춤이 국회 앞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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