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민중음악가 ‘테오도라키스’

[나의승의 음악이야기 17]

등록 2003.05.13 01:58수정 2003.05.18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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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1925년 7월에 그리스의 섬 키오스(Chio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음악에 매력을 느꼈고, 어떤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노래를 작곡했다.

17살에 처음으로 합창곡과 협주곡을 작곡한 이후로, 식민지 점령군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2차 전쟁 이후 벌어진 그리스 내전 중에 ‘아테네 음악원’과 ‘파리 음악원’에서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으로부터 ‘음악분석’을, ‘유진 비고’(Eugene Bigot)로부터 ‘지휘법’을 배웠다.


그의 파리에서의 시간들은 창작의 의욕을 돋우었던 시기였다. 당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첫 번째 교향곡, 첫 번째 모음곡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57년에는 ‘모스크바 음악 페스티발’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공식음반중 첫번째 생일 축하공연 음반 재킷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공식음반중 첫번째 생일 축하공연 음반 재킷나의승
59년에는 다리우스 밀하우드(Darius Milhaud)의 제안으로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발표했던 발레 ‘안티고네’(Antigone)의 공연으로 미국 Copley-Music Prize에서 수여하는 그해의 ‘최우수 유럽 작곡가 상’을 받았다.

60년대에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만들어 졌는데,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트리오/ 교향곡1번, 발레곡 ‘그리스 축제’(Greek Carnival),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삶과 죽음(목소리와 현을 위한 곡), 발레곡 ‘Oedipus Tyrannos'등이 있다.

‘테오도라키스’는 60년대 그의 뿌리인 그리스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그가 서부유럽의 클래식 음악으로부터 진정한 그리스의 음악으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에피타피오스’(Epitaphios)라는 연작의 노래로부터, 조국의 문화혁명을 시작했다. 그 내용은 위대한 그들의 조국 그리스의 세계적인 시(poetry)들에 그리스 고유의 음악적 생명력을 부가함으로 해서, 온전하게 그리스의 유산으로 자리 매김 하는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음악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아테네에서 작은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많은 공연을 했고, 63년에는 ‘람브라키스 민주청년’(Lambrakis Democratic Youth)을 조직했고, 대표가 된다. 64년에는 그리스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67년 그리스에 ‘파시스트’독재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지하로 숨어, 애국자 전선(Patriotic Front)을 조직했고, 독재정부는 그의 음악을 연주는 물론이고 듣는 것도 금지 시켰다. 그때부터 그는 체포되고, 투옥되며, 추방당하고, 망명했다.


그는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레너드 번쉬타인(Leonard Bernstein), 아서 밀러(Arther Miller), 헤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등과 함께 국제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모임을 앞에서 지휘했고 70년에는 망명했다.

그는 망명 중에도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국제적 상징인물이 되었으며, 싸우기 위해서 수천의 콘서트를 했고, 국제적인 연대의 하나되는 힘을 모으는데 전력을 다했다.

조국의 해방이후로 마치 개선장군처럼 돌아와, 정부에서 몇 번의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너무도 유명한 ‘희랍인 요르바’(영화 및 발레곡) 이후에 79년에는 ‘오딧세이아스 엘리티스’(Odysseas Elytis)의 노벨상 수상작인 시를 ‘엑시온 에스티’(Axion Esti)라는 ‘오라토리오’로 작품화한다.

그리고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기차는 8시에 떠나고’는 그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표 작품 중 하나다.

90년대 초 ‘콘스탄틴 미초타키스’정권에서 90년부터 93년까지 장관을 지낸 다음, ‘헬레닉’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의 합창단과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음악 감독을 지냈으며, 그 즈음 국제적으로 인권과 평화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터키의 음악가이자 가수로 알려진 ‘쥘퓌 리바넬리’(Zulfu Livaneli)와 함께 그리스-터키의 인권과 평화의 연대를 만들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대개 그의 홈페이지로부터 옮긴 짧은 이야기이다.

그의 삶을 글을 통해 잠시 나마 생각해 보면, 그의 창작 작품들이 유럽전통의 클래식에서부터, 흔히들 그리스의 ‘블루스’라고들 말하는 레베티카(Rebetica)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들을 엿 볼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음악의 뿌리가 정신적으로 조국에 깊이 근거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흔히 그런 음악가들을 ‘국민음악파’ 라고 말하기도 한다.

세계의 근대 역사를 보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약소국들에는 대개 식민지의 시절과 전쟁의 세월이 지나다 보면 독재정부가 들어서고, 그러한 기간동안, 민중들은 동토(凍土)에 얼고 추위에 떨며 살아온 것 같다. 거기에는 한국도 포함된다.

필자는 언젠가 뉴질랜드에서 온 친구이자 사회주의자인 ‘조’가 남겨준, ‘체 게바라’의 말을 기억한다.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말들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중 혁명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또는 세계인들에게 ‘민중사랑’의 음악가 일 것이다. 그의 삶이 그러했으므로 그의 공식음반 가운데 두 번의 ‘생일축하 공연’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먼저 95년의 70세 생일 축하 공연은 ‘테오도라키스’와 그리스의 전통악기인 ‘부주키’, 그리고 ‘마리아 파란투리’(테오도라키스 노래의 뛰어난 해석을 들려주는 대표적인 가수로 인정받은 사람)와 첼로 등의 어쿠스틱 악기들로 독일의 ‘뮌헨’에서 공연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최고의 음반으로 기록될 75세 생일 콘서트 음반 재킷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최고의 음반으로 기록될 75세 생일 콘서트 음반 재킷나의승
그리고 2000년, 역시 뮌헨에서 75세 생일 축하콘서트가 열렸다.

75세의 늙은 음악가에게 바쳐지는 ‘밀바’(이태리)의 ‘To Treno Fevgi Stis Octo’(기차는 8시에 떠나고)라는 노래는 올해로 64살(39년생)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도 의미가 컸을 것 같다.

이 콘서트엔 ‘파란투리’, ‘마리아 델 마르보네’,‘조셀린 B 스미스’,‘페트로스 판디스’, 등도 참가하고 있다. 75세 생일 축하콘서트 실황을 담은 음반 속의 노래들은 대개 아름다워 그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2005년에도 살아있다면 아마도 80세의 기념공연을 하게 될 것 같다. 그의 살아온 이력이 그렇지 않다면 작곡가로서의 ‘생일기념공연’이란 있기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서 2005년이면 ‘5월광주’도 25주년이다. 혹시라도 광주에서 ‘민중항쟁’과 ‘인권’과 ‘평화’를 기념하는 국제적인 음악공연이 열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DVD나 CD를 통해서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그런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일뿐 아니라 5월광주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그무엇 보다도 음악이 가장 효과적일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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