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추억을 낳는다

가마솥과 나무창문에 얽힌 추억단상

등록 2003.05.15 16:17수정 2003.05.1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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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추억을 낳는다. 추억이라는 놈이 어디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잊혀졌던 추억들을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추억이라는 놈은 그것이 기쁜 것이었든 슬픈 것이었든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리 불쾌한 손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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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장작불이 지글지글 타며 끓는 가마솥은 아니었지만 하얀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품새를 보니 가마솥에 얽힌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아주 어린 시절 황토흙으로 만든 부엌에 걸려있던 가마솥에 쇠죽을 끓이곤 했다. 쇠죽을 끓일 때 콩깍지를 넣고 끓이다보면 덜 털어진 콩이 잔뜩 부풀어 모락모락 김을 내곤 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는 콩을 어찌 마다하랴!

큰 가마솥에 메주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으면 그 구수한 냄새에 자꾸만 부엌을 기웃거리며, 콩이 익기도 전에 한 줌 두 줌 얻어먹다가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기도 했다. 삶은 콩을 자글자글 뜨거운 아랫목에 솜이불로 덮어두면 쫀득쫀득한 청국장이 된다. 기이한 냄새, 그러나 청국장에 신 배추김치를 넣고 끓이면 맛이 그만이다. 맛있던 기억은 풋풋한 밥상을 그립게 한다.

막 가마솥에서 쪄낸 콩으로 메주를 만들기 위해 자루에 넣고 밟는다. 장화를 신고 하다가 어느 정도 식으면 맨발로 하며 콩의 따스한 기운을 통해 기를 얻는다. 동상에 걸렸을 때 양말 속에 콩을 집어넣고 자면 좋다고 했다. 그러니 뜨거운 콩이야 오죽 좋았을까.

메주의 마르는 모양새는 쩍쩍 갈라지고 곰팡이가 끼고 영 볼품이 없지만 메주가 없었다면 우리의 음식문화는 별로 맛깔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마솥 요리의 대명사는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돼지비계를 두르며 가마솥뚜껑에 부쳐내는 부침개라고 생각한다. 파전부터 시작하여 김치전까지 동네 아줌마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부침개를 부쳐내고, 아저씨들은 멍석에 앉아 부침개를 안주 삼아 거나하게 뽀얀 막걸리를 마시던 풍경이 백미가 아닌가 싶다.


막내아들 결혼잔치를 준비하는 어머니가 가마솥에 돼지를 삶고 있다.
된장을 풀어 삶는지 냄새가 진동을 하고 군침이 절로 드는데 얼마나 더 익어야 할지 시간만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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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알루미늄 섀시가 창문을 잠식해 들어가고 이젠 완벽한 나무의 색까지 만들어내는 통에 흔하게 보던 나무창문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창문이 정겨워 보이고, 이것 역시 창문에 얽힌 추억들을 스멀스멀 기어 나오게 한다.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창문에 들이치다보면 나무가 빗물에 불어서 잘 열리질 않았다. 제대로 아구가 맞지 않은 창문은 바람에 흔들리며 나무와 유리의 묘한 조화음을 냈다.

옛날 집은 낮았고, 창문도 그리 높지 않아 어른들이 지나다 창문으로 방안의 풍경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인 곳도 많았다.

방음이 완벽하지 않으니 사랑하는 애인 불러내는 수단으로 창문 밖에서 휘파람을 불면 얼른 뛰어나가 님을 만나던 청춘남녀들의 사랑이 보이는 듯하다.

겨울이면 나무 창문에는 성에가 끼고, 멋진 성에꽃을 만들어 내곤 했다. 바깥을 보려고 입김을 불면 잠시 뒤에 다시 하얗게 피어나다가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면 쏜살같이 도망치던 성에를 잊은 지 오래다.

우리들에게 잊혀지고 있는 것들 가운데 소중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아이들은 이 다음에 가마솥을 보며 떠올릴 추억거리도 없을 것인데 무엇으로 그들에게 아련한 추억들을 만들어 줄 것인가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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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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