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나리아'가 사라진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2003년 이상문학상 특별상 '플라나리아'의 모호함에 대해

등록 2003.05.17 15:16수정 2003.05.1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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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취향에 따라 소설을 읽는 탓에 의무감을 갖고 작품을 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축복이다. 모든 사정 제쳐두고 내 취향에 집중할 자유가 있으니 책읽기는 즐겁고 신난다. 그토록 편하고 짜릿하게 생활의 활력을 주는 시간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즐겨 찾는 작가의 작품이 이른바 순수문학 부류에 속할 때에는 그 작품이 계간지에 끼어 있거나 무슨 무슨 수상작 묶음에 속해 있는 게 대부분이라 덤으로 원치 않는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책을 읽는 중에 뜻밖에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을 발견하면 횡재하는 날이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부지기수다. 200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특별상 수상작인 전상국의 '플라나리아'는 후자에 속한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함께 사는 남녀가 있었는데 여자가 훌쩍 사라졌고 플라나리아에 미친 남자는 여자와 플라나리아를 한데 묶어 생각하고 둘의 미묘한 차이와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자에 대한 갈망이 끝 없이 드러나고 어느 순간 자기 자신마저도 여자와 플라나리아 사이에 놓고 만다. 줄거리보다는 상징성에 힘을 실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특별상으로 낙점한 심사위원회는 이렇게 평한다.

"자웅동체로 무성생식하는 플라나리아의 은유를 통해,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배우자가 떠난 후 홀로 남은 남자의 존재론적 고뇌를 천착한 뛰어난 소설이다. (중략) <플라나리아>는 인간 복제 모티프를 차용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떠남과 갈라짐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합일과 분리 문제를 탐색한 보기 드물게 신선하고 탄탄한 문학적 성과를 이룬 작품이다."

직설보다는 우회와 곡설을 선호하는 전문 비평의 언어이므로 몇 번 걸러 읽어야 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극찬이고 대단한 환대다. 이런 작품에 의심과 불편의 화살을 쏘아대려니 손끝이 덜덜 떨릴 지경이다.

이 작품에 쓰인 은유의 기법과 함께 가장 중심이 되는 구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진 것들(주로 여자)을 찾는 과정이다. 화자의 입장에 몰입해 읽다보면 왜 여자가 사라졌는가에 의구심을 품는다. 하지만 그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화자가 어떻게 사라진 것들을 회고하고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으며 쏟아내는 생각과 낯선 경험을 바라볼 뿐이다. 원인 모를 결과와 그것에 달라붙는(천착한다고 하는) 과정을 함께 할 뿐이다.

분명히 소설은 논설문이나 설명문과는 다르다. 쫙 짜여진 구조 속에 일일이 근거를 들어 읽는 이에게 원인과 결과의 구조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사건의 원인을 상상할 수 있는 혹은 사건 개연성의 실마리를 지극히 작위적이고 불분명하게 툭 던져놔서는 곤란하다. 분명히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소설 속 개연성의 세계를 짜놓아야 소설의 완성도를 논할 수 있다. 이 작품이 그리는 세계에는 모호함과 모순이 지나쳐 개연성의 흐름이 끊긴다.


여자는 몸 어느 구석에서 새소리를 낸다. 말소리마저 어린 아이처럼 나오게 한다는 그 새소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람이 입이 아닌 몸 어느 구석에서 '새처럼'이 아닌 새소리를 낸다고 하니 신기하기는 하다. 집을 떠남이 결코 가출이 아니라 증발이라고 하는 알 수 없는 규정을 내리는데 이러한 여자의 행적은 그 근거를 마련하기도 한다.

평범한 인간은 집을 나가면 가출이 되지 증발로 여겨지지 않음을 아는 작가의 재치 넘치는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소리를, 신비한 소리를 낸다는 의미는 소설 속에서 상식 밖의 규정에 맞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효과로 그친다.


애초부터 여자의 출현과 사라짐의 원인을 알려주지 않는 구조인 탓에 여자는 모호한 분위기 속의 여인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고 새소리는 거기에 한몫 한다. 하지만 그런 여자의 반대에 서 있는 남자와 그 남자의 주변 세계는 먹고 자고 (학교 교사로)일하는 일반의 세계다. 일반과 특이가 충돌하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충격은 미미하다.

일반의 세계에 사는 남자는 신비로 꾸민 모호한 여인을 너무도 또렷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새소리를 낸다는 모호한 여성을 간단히 용인하고 자신의 세계의 일부로 착각 아닌 인정을 하는 과정은 생뚱맞고 낯설어서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것이 (어떤 알 수 없는) '은유'라고 심사위원들은 말하지만 정당한 은유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소설 말미에서 플라나리아로 분위기를 연출한 자기복제가 일반 세계에서 빈번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연인을 잃은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서 혹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연인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몰두하는 일은 흔하다. 이 작품은 그 점에 착안한 자기 복제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환상문학이나 공상과학 소설이 아닌 소설에서 그것도 정상 세계에 뿌리박은 인간이 꾸미는 행동과 사고방식으로 단지 플라나리아만을 근거로 자기 복제를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경우 우리가 흔히 취할 수 있는 반응은 정신이상이다. 정신이상자라면 어떤 돌출행동과 사고방식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화자는 정신이상이 아니다. 단지 작가의 설정이 상식적인 인간과 특이한 현상의 접목인데 그 접목은 충돌이 분명하다.

이 충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독자를 위한 분위기 연출만이 아닌 납득할 만한 근거 제시가 필요하다. 단순히 화자의 고통을 보여주고 거기에 동참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정당한 거짓으로 독자를 납득시켜야 할 소설로서는 불친절을 넘어 태만이다.

문학 작품이 취하는 특별한 설정을 상식을 벗어나더라도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독자가 용인할 수 있는 까닭은 개연성에 있다. 소설이 취하는 모든 특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처음부터 모호한 설정과 이유 없는 특별이었으니 마지막도 자기복제가 가능한 생물과 이어진다고 간단히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앞뒤 맞음은 오히려 더욱 더 작품의 모호성을 짙게 한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은유가 아니라면 그 시작과 끝을 납득할 만한 근거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혹은 작품의 구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은 이러한 신비주의 혹은 신비를 가장한 모호함이 90년대 중반부터 수상 경력이 화려한 작가와 그 작가와 한데 묶일 수 있는 일군의 작가들이 수상작에서 자주 보여준 수법이라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심사위원회가 말하는 이 작품의 신선함은 적어도 이 새소리로 비롯한 신비감 조성에는 허락할 수 없는 평가다.

사실 직업이 아닌 취향으로 재미로 소설을 읽는 자로서 마음에 맞지 않는 소설은 두 번째 장을 넘기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부러 평을 하는 까닭은 자칫 일반 독자의 이해는 외면한 채 작가와 비평가들만은 탁월한 능력으로 인정하고 인정 받는 밀원관계가 지속되어 온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소설이 '플라나리아' 식의 증발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서이다. 부디 작가 스스로 말하는 '오랜 글쓰기에 대한 회의의 탈출구'가 비평가에게 인정 받기 좋은 글쓰기 방식에 유혹당한 결과는 아니길 바란다.

플라나리아 - 제124회 나오키상 수상작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양윤옥 옮김,
예문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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