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으로 이르는 길, 마치 깊은 삼림대를 수상 스키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었다.박도
백두산이 가까워질수록 언저리의 수목은 더욱 우거지고 길은 오르막길이었다. 이 길은 평소에도 일반 차량 통행이 뜸한, 주로 백두산 임장에서 목재를 실어 나르는 트럭들의 전용 도로였다.
그런 탓인지 도로에는 전혀 이정표가 없었다. 백두산에 수없이 손님을 실어 날랐다는 한 기사도 이 길은 백두산에서 돌아올 때 꼭 한번 지났다면서 다소 자신이 없어 보였다.
어느 비탈길을 오르는데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깊은 삼림 속이었다.
지난날 항일 빨치산 대원들이 밀영 터로 삼았을 그런 첩첩 산중이었다. 도로에서 조금만 빠져나가면 우거진 숲으로 종적을 찾지 못할 밀림지대였다. 항일 전사들의 천연 유격대 근거지로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일행은 두 갈래 길에서 눈을 씻고 봐도 백두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서 어느 길로 가야할 지 종잡을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중국대륙을 다니면서 여러 차례 느낀 바는, 도로에 이정표가 매우 드물어 초행길 나그네에게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장춘에서 하얼빈을 달릴 때도 280여 킬로미터가 되는 먼길에 이정표는 두어 곳뿐이었다.
나머지 길은 그야말로 ‘이정표 없는 거리’를 달리는 셈이었다. 이는 중국인들의 ‘만만디’ 정신으로 해석해야 할 지, 아니면 그 만큼 외부인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 폐쇄성이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개방 물결이 아직도 일부 도시에만 일고 있는 때문인가 보다.
깊은 산중에서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삼림욕 겸 쉬면서 지나가는 차를 마냥 기다렸다. 10여분 후, 원목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이 나타나서 그 기사에게 길을 묻고서야 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산길을 한참 달리자 긴 서까래가 한 ‘一’자로 길을 막았다. 통행료를 내야만 지날 수 있다며 한 기사는 차에서 내렸다. 한 기사가 도로에서 30미터 거리에 있는 사무실로 가서 통행료를 내고 돌아오자 그제야 복무원은 도르래 줄을 당겨서 길을 열어주었다.
참 재미있는 나라였다. 그네들은 ‘우리들은 조금도 아쉬울 게 없다. 너희가 이곳을 지나려면 여기까지 와서 통행료를 바치고 가라’는 배짱이었다.
포장도 안 된, 더욱이 이정표도 없는 도로에 무슨 통행료인가? 내가 불평을 늘어놓았더니, 한 기사는 ‘가재는 게 편’으로 같은 국적의 그들 편을 들었다.
이 길은 임도(林道:목재 운송용 도로)로 닦은 길이기에 다른 차량은 마땅히 통행료를 내야만 이나마 도로를 유지한다고 했다.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도로 통행료를 두어 차례 더 냈다.
이 나라는 지방 자치제가 철저해서 성(省)이나 현(縣)마다 독립채산제로 도로관리를 하기에 그렇다고 했다. 차단 목을 통과하자 마침 통나무집 휴게실이 나타났다.
한 기사는 이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승객으로서 기사의 말을 어찌 거스를 수 있으랴.
산중 찻집은 마냥 고즈넉했다. 한족 청년이 느글느글한 미소를 지으며 타 주는 쓴 커피를 마시고 값을 치르는 데 커피 세 잔 값으로 50원을 요구했다. 50원이면 세 사람의 한끼 밥값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내 경험으로는 산 사나이들은 대체로 순박한데 그는 산사나이답지 않게 음흉해 보였다. 그에게 톡톡히 바가지를 썼다. 하기야 이 깊은 산중에 어쩌다가 지나치는 팔자 좋은 이방인에게 바가지를 안 씌우면 누구에게 씌우랴.
한족들은 중화사상이 몸에 밴 탓인지 외국인에게는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많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숙박료도 입장료도 외국인에게는 대부분 더 받았다. 그래서 김 선생은 나와 이 선생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특히 빈관 로비에서는 일체 입을 닫으라고 했다.
괜히 외국인 티를 내서 바가지를 쓸 필요가 없다고, 당신은 중국인처럼 보이려고 남방 셔츠까지 중국제를 입고 답사 길에 나섰다.
다시 뙤약볕 산길을 달렸다. 우거진 숲에서 매미들은 발악을 하면서 제 철을 마냥 즐겼다. 띄엄띄엄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이곳 산 마을의 집들은 온통 통나무나 널빤지로 만든 집이었다.
나무가 흔한 곳이니까 그럴 테지. 백두산 밀림지대답게 지상에는 온통 나무들이다. 휴게소를 떠나 다시 한참을 달리자 쑹장〔松江〕이라는 조그마한 촌락이 나왔다.
이 마을도 온통 원목을 쌓아둔 임장(林場)이요, 제재소였다. 강원도 태백이나 사북 같은 도시는 온 시가지가 석탄으로 뒤덮여 있듯이, 이 일대 도시와 마을은 온통 나무로 뒤덮였다. 골목길에도 나무껍질과 톱밥들이 겹겹이 지천으로 쌓여 있었다.
백두산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도로 양편에는 삼림들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잣나무, 잎갈나무, 가문비나무들이 마치 근위병처럼 버티고 있어서 차를 타고 달리자 사열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치 개선장군이 된 양 으쓱한 마음으로 숲길을 달렸다. 싱그러운 초록의 숲을 달리는 기분은 수상 스키어의 기분이랄까. 산을 오를수록 나무 군락이 변했다. 곧 도로 언저리에는 하얀 자작나무가 어느 새 하늘을 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