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하는 대통령에게

등록 2003.05.26 12:12수정 2003.05.2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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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술자리에서였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던 선생님이 저에게 이렇게 묻습디다. "우리가 `노무현 개XX' 하고 말했을 때 어떻게 될 거 같아요?" 하고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 <오마이뉴스>에 글이름을 "노무현 개XX"라고 달아서 기사를 올린다면? 그때 어떻게 될까요?

큰 탈이 없으면 그대로 기사가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또한 그 기사를 쓴 저도 어디에 불려가거나 잡힐 일도 없으리라 보고요. 나아가 그 기사를 실은 <오마이뉴스>도 `폐간'되는 일이 없겠죠.

좀더 생각해 보니 "김대중 개XX"라 말해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개XX" "노태우 개XX" "박정희 개XX"라고 했다면? 지금이야 전두환도 노태우도 박정희도 물러났고 그네들이 해온 `철권 군사 독재' 정권도 막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옛 대통령이라 하지만 그네들 이름 뒤에 `개XX'라는 말을 붙여서 욕을 해도 어느 누가 우리를 잡아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요. 박정희가, 전두환이,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그 사람들 이름 뒤에 `개XX'를 붙여서 "야 이 박정희 개XX야" 하고 말했다면? 그때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우리는 `안 잡혀'가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택시에서, 버스에서, 또 길에서 대통령에게 `불경스럽다'는 말을 한 사람은 소리 소문 없이 남영동으로 끌려간 게 엊그제였습니다. 그때는 `박정희 개XX'까지도 아니고 `그 박정희라는 사람이'라고만 말해도 은근슬쩍 신고를 했습니다. 박정희는 `대통령 각하'였으니까요.


대통령 노무현 씨에게 드리는 말씀

김대중 정권에 이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달리 아무런 방해 세력이 없는 노무현 정권입니다. 김대중 정권은 자민련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장관도 숫자에 따라 나눠먹기를 해야 했고 개혁도 발목 잡힐 만한 안건은 내놓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걸림돌이 없습니다. 올곧게 개혁 정책을 밀고 나가면 그만입니다. 국회의원 의석 숫자는 모자랍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바라는데, 또 여론이 높은데도 개혁을 밀고 나가지 못한다면 그건 대통령과 대통령을 모시는 참모들이 저지르는 잘못입니다.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는 까닭이 있습니다. 노무현을 믿고 표를 던진 사람이, 또는 권영길 씨를 찍고 이회창 씨를 찍으면서도 `개혁'을 바라던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다면 까닭이 있습니다. 국민이 무식해서, 국민이 대통령 속마음을 못 읽고 등을 돌리지는 않습니다.

살기 팍팍하고, 먹고살기 힘들어도 참고 믿는 게 우리 국민입니다. 하지만 거듭된 실망과 거듭된 아쉬움과 거듭된 볼썽사나움은 조금씩 우리들 국민이 지닌 믿음을 갉아먹습니다. 시나브로 갉아먹어서 어느새 지지율이 십몇 퍼센트, 또는 이십몇 퍼센트까지도 떨어지게 만듭니다.


대통령도 사람이기에 말 잘못을 할 수 있고 개혁 정책 키를 잘못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한 말은 사과하면 됩니다. 잘못 잡았던 개혁호 키도 올곧게 돌려 잡으면 됩니다. 바른 길을 가겠다고 하는데, 바른 길을 가려 했는데 자칫 샛길로 샜었다고,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대통령이 말하고 고개 숙이는데 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시금털털하고 꾸밈이 없는 노무현이 좋아서, 그 모습 그대로 대통령 해서 우리 삶을 한결 나아지게 해 달라고 뽑았습니다. `현실 정치'도 좋고 `현실주의 노선'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건 방법론이지 열매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느낌, 삶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살로 다가오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왜 대통령 국무회의에는 보통사람들 목소리와 반대파 목소리가 없는지요. 현실에서 살아가는 이해 당사자들 목소리가 없습니다.

장관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다 하더라도 국민이 아닌 장관 자리에서 보통사람들 목소리를 100% 듣는다고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까지 장관과 여러 참모가 보여준 모습은 `참여정부' 참모와 장관에 걸맞지 않는 권위와 독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신이 아니니까요. 대통령이 자기만 옳다고 모든지 밀어붙이며 해내기를 바라지도 않으니까요. `참여' 정부로 다섯 해 대통령 일을 하겠다면 진짜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와대 둘레에 바리케이트만 치웠다고 참여 정부가 되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이 텔레비전 토론모임에 몸소 나간다고 하여 참여 정부가 되지도 않습니다. 현장에 있는, 그러니까 이 나라 구석구석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살과 마음으로 느끼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참모와 장관과 공무원과 대통령이 한 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대통령 노무현 씨, 당신이 갈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힘들겠지요? 길이 하나뿐이라니까. 하지만 그 길을 잘 가면 아주 좋습니다. 샛길이나 다른 길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옳고 바르며 곧은 길, 정치하는 노무현부터 대통령 하는 노무현까지 곧게 이어온 한길, 이 나라 보통사람들이 남을 속이지도 등 떼먹지도 괴롭히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속지도 등 떼먹히지도 괴롭힘 받지도 않는 길로 가는 개혁, 그 길 하나입니다.

대통령 노무현 씨가 무릎을 꿇고 우리 앞에 나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서 큰소리 뻥뻥 치고 꾸짖는 목소리 높이기도 바라지 않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이 못마땅하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

우리는 언제라도 "노무현 개XX"라고 말할 수 있고, 말해도 좋으며, 하고 싶다면 말할 일입니다. 하지만 말은 말로 끝내야겠죠. 이제 겨우 100일도 안 된 새 대통령입니다. 하지만 100일도 안 된 대통령이 정책이 어수선하고 갈피를 못 잡는다면 문제로 삼을 수 있겠죠. 하지만 참아야겠습니다. 더 지켜보아야겠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직 말도 못하는 백일 된 갓난아기에게 말을 걸 수 있는가요. 갓난아기는 잘 걷지도 못하는데 갓난아기보고 심부름을 시키거나 달리기를 하라거나 빨래를 하라거나 물건을 들라고 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대통령 노무현 씨가 힘들어하고 개혁 키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헷갈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대통령에게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똑바로 하라"고, "실망이야" 하고만 말한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갈 길은 뻔합니다. 그건 바로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바라는 길입니다.

개혁 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을 믿고 함께 일을 할 사람으로 삼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일을 하게 될까요. 노무현 대통령을 실망스럽다고 하며 벌써부터 등을 돌리면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사람에게 자기 눈높이를 맞춰서 정책을 이끌어 갈까요.

물론 노무현 대통령도 자기를 `실망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마음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생채기 난 아픈 가슴을 달래고 어루만지며 밑바닥 보통사람들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박지원 장막'에 가로막혀서 현실을 보지 못한 잘못을 노무현 대통령이 깨달아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인태, 문희상이라는 `비서실장 장막'과 `여러 장관들 장막'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우리들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도 힘을 모아야 해요. 노무현 대통령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런 때야말로 갈피를 잡을 수 있도록 시민모임과 뜻있는 분들이 목소리를 모아서 대통령에게 바르고 곧은 길,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슬기로운 정책과 대안을 머리를 짜내고 머리를 굴려서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개혁 정책을 제대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지금입니다. 그런데 지금 분위기를 보면 오히려 반개혁, 역개혁으로 거스를 수도 있다는 느낌이에요. 참으로 위험한 때입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김대중 정권 때에도 "한총련 합법화"라는 화두가 나오기 어려웠으나 적어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라도 그 화두가 나옵니다. 더구나 한총련 의장이 텔레비전 토론모임에서 대통령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건 노무현 정권이기 때문에 이뤄진 일입니다.

조중동만 보던 대통령이 <한겨레>도 보고 <한겨레21>도 보고 <오마이뉴스>도 봅니다. 이런 발전과 변화는 아주 더딥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어요.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는 일은 좋지만, 비판으로만 가득차면 안 됩니다. 비판해야 할 모든 일은 비판을 합시다. 이와 함께 우리들 슬기와 힘을 모아서 노무현 대통령이 올곧은 정책을 힘있게 밀고나갈 수 있도록 도우미가 되어야지요.

옛말에 `참고 참고 또 참는다'고 했습니다. 세 번 참았는데 또 힘들게 하면 어떡하느냐고 물으니 그럼 `세 번 참는 일'을 또 하라고 하더군요. 노무현 대통령을 볼 때도 그리하면 어떨까요. `믿고 믿고 또 믿는' 겁니다. 그래도 믿음이 가지 않으면? 그럼 "세 번 믿음"을 다시 한 번 믿는 거지요. 그렇게 믿으면서 개혁을 더딘 빠르기로라도 제대로 이룰 수 있도록 함께 일을 해야지요.

대통령이 위에서 말하는 `참여'가 아닌, 우리들 보통사람이 아래에서, 아니 `옆'에서 함께하고 어깨동무를 해서 힘을 싣는 `참여'로 말입니다. 엇나가고 비틀리는 모든 정책은 그 잘잘못을 따지고 가려서 밝히고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함께 해나가고, 제대로 이어나갈 수 있는 새롭고 아름다운 정책도 우리가 스스로 짜내는 겁니다.

옛날 대통령은 자기들을 `신'으로 여기고 자기들 머리와 참모 머리만으로 정책을 한다고 우쭐댔습니다. 하지만 지금 새 대통령은 우리들 보통사람이 짜내는 알차고 아름다운 정책을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여서 밀고나갈 수 있도록 우리들이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새만금 살리기'를 하자며 전라북도 변산에서 `한 번 절하고 세 번 걷는' 그 마음으로 말입니다.

앞으로 낳아서 기를 아이에게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북녘을 단칼에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미국 정권은 노무현 정권이 마음에 안 들면 북녘을 날려버리듯 노무현 정권을 날려버릴 힘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 정권은 `한다면 하는' 조직폭력배와 같습니다. 칠레 아옌데 정권도 미국이 일으킨 쿠테타로 한 줌 재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민주와 자주를 이루려던 한 나라 대통령을 총칼로 무너뜨리고 독재자를 세우는 미국 정권이 아닙니까.

이런 세계 질서 속에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너무도 보잘것없고 작습니다. 그래도 노무현 당신, 대통령이라는 노무현 당신이 잘못하면 언제라도 욕을 하고 비판을 해야겠습니다. 다만, 믿고 싶습니다. 아니, 믿겠습니다.

대통령이 된 첫마음으로, 아니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첫마음으로 대통령 임기를 마무리짓기를 말입니다. 대통령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골치 아픈 일입니다. 더구나 감옥소에 갇힌 것 같이 괴롭고 외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아무나 못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이 나라 사천칠백만 국민, 이북까지 해서 칠천만이 넘는 한겨레, 중국 조선족과 일본 조선족을 더해서 칠천오백만, 팔천만 한겨레가 하나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무척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큰일을 하기에 보람이 있고 아름다운 일이 바로 대통령입니다. 대통령 노무현 씨. 힘들죠? 힘들면 소주 한 잔 걸치고 김치 한 조각 베어 무십시오. 삼겹살도 한 점 드시고요. 우리들은 뼈빠지게 일을 하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고 김치를 질겅질겅 씹으며 그날그날 겪었던 어려움을 풀어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보람을 느낍니다.

청와대에서 다섯 해 동안 하루도 바람 잘 날 없고, 하루도 골치 안 아플 날이 없을 겝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대통령 노무현 씨, 당신네 딸아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스무 해가 넘는 동안 하루라도 바람 잘 날이 있었는가요? 시집장가 보내는 날까지도 힘들지 않았던가요. 그러나 힘들고 어려워도 아이를 키우는 보람이 있지 않았는지요?

대통령을 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대통령을 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즐거움은 바로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겪고 부대끼는 모든 웃음과 울음과 눈물과 슬픔과 신남을 고루고루 생각하고 헤아리고 보듬고 껴안으면서 살아가고 일하는 즐거움입니다. 부디부디부디...... 그 마음 고이 지니며 싱긋 웃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힘들었다 해서 앞으로도 힘들기만 하란 법은 없겠지요? 웃어 주십시오. 당신을 믿고 당신을 뽑은 이 나라 국민 앞에서 웃어 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당신 앞에 남은 네 해하고도 예닐곱 달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부지런히, 힘차게, 병치레 하지 말고 튼튼히 올곧은 개혁 정책을 밀고나가 주십시오.

당신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때쯤 저와 아내는 아이를 낳아서 기를 생각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당신 이름 석 자가 참 훌륭했다고, 하지만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에게 표를 던진 우리들, 그러니까 아내와 제가 훌륭한 선택을 했기에 우리 아이가 이 나라에서 무럭무럭 씩씩하게 자랄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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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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