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2감호소 중앙 감시탑에 무장한 교도대원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보호감호가 이런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땐 무척 슬펐어요. 마지막 징역살이 하면서 나 스스로는 재범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부모 형제 가족 위해 살고 싶었고, 내가 지은 죄를 갚기 위해서 살겠다는 마음 먹었어요. 전과 몇 범이 되더라도 가족들은 그나마 날 감싸주지 않겠어요.(울먹) 하지만 보호감호 4년 동안, 사회에 돌아갈 수 있는 가정이라는 마지막 울타리까지도 무너졌어요."
올해 나이 마흔 여섯, 보호감호 4년째인 조석영씨. 자신의 죄과에 대한 참회를 수없이 되뇌었을 그였겠지만, 아직도 '가족'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르지 않는 듯 두 눈에 금새 눈물이 고였다.
청송감호소 피감호자들의 '눈물'과 단식
석영씨는 세간에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의 '소굴'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청송보호감호소(이하 청송감호소. 경북 청송군 진보면 소재)의 '피보호감호자' 신분이다.
공사판에서 사소한 시비로 생긴 폭력사건과 단순절도 등으로 젊은 시절 몇 차례 교도소를 드나든 그는 지난 96년 절도죄로 징역 3년을 마친 후 이곳에서 4년째 '청송 생활'을 하고 있다.
징역 3년을 모범수로 보낸 그는 청송감호소에서 다시 보호감호 7년을 마친 후 2006년에야 비로소 사회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가출소 기회는 있지만 통례상 적어도 4~5년의 감호생활은 각오해야 한다.
석영씨는 지난 해 '사회보호법 폐지' '피감호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면서 네 차례나 반복됐던 청송2감호소 피감호자들의 단식 농성에 동참했었다. 그리고 해를 넘긴 지난 5월 23일부터 시작된 단식투쟁에서도 대열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기자는 청송감호소에 정식면회를 신청, 28일 오후 2시부터 30분간 석영씨를 만났다. 당시 그는 5일째 단식농성중이었다. 인터뷰 도중 그는 연신 자신의 오른손을 귀에 갖다 댔다.
- 귀가 잘 안들리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 그런가?
"지난 해부터 귀가 잘 안들려 진찰을 받았는데 의사는 신경과다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 단식농성 5일째인데…. 건강은 어떤가?
"목숨 걸고 하는 일인데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지난해 단식을 해본 경험도 있고 이번이 네번째라, 그나마 잘 버티고 있는 편이다."
청송감호소측은 23일부터 시작된 단식농성에 당초에는 전체 피감호자 700여명 중 500여명 정도가 참가했다가 최근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고 밝혔다. 하지만 감호소측은 단식 농성 참가자들의 정확한 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하지만 석영씨가 말하는 감호자들의 농성 분위기는 감호소측의 입장과는 상반돼 보였다. 오히려 더욱 강경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고 석영씨는 전했다.
"감호소측은 540명 정도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들로 봤을 때는 650명 선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주 강경한 분위기이죠. 저는 오히려 온건한 쪽에 속합니다. 얼마 전 법무부 보호국장과 교정국장도 다녀갔지만 그 후 확실한 답변을 아무도 주지 않았어요. 공식적인 처리 과정을 감호자를 대상으로 밝히기는 뭣 하겠지만 어떤 언급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어 분노가 치밀어오를 대로 올라 있는 상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