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땅에서 당당하게 살고 있는 조선족

항일유적답사기 (28) - 연길(1)

등록 2003.05.31 13:00수정 2003.05.3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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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연길 시내에 있는 민속박물관

연길 시내에 있는 민속박물관 ⓒ 박도

연길(延吉)

1999년 8월 7일(토).
어제는 카메라 문제로 오후 내내 마음이 언짢았는데, 이상하게도 백두산 답사를 마치자 거짓말 같이 제대로 작동이 되었다. 꼭 무엇에 씐 기분이었다.


간밤 늦게 연길에 돌아온 후, 카메라 수리점을 찾았으나 모두 문을 닫았다. 수리점 앞에서 한룡운 기사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더니 반사경 스프링이 얽혔다면서 곧장 제 고쳐줬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백두산 등정에 옥에 티였다. 이 정도 티라면 무릇 감사해야 할 일이다.

오늘 일정은 답사 길에 나선 후, 처음으로 시간의 여유가 다소 있었다. 연길에서 장춘으로 이동하는 날인데, 미리 비행기 예약이 되지 않아 약간 애를 먹었다. 애초에는 이른 아침 열차로 온종일 연길에서 장춘까지 이동하기로 계획되었다.

다행히 어제 김 선생이 빈관에 머물면서 비행기 표를 어렵게 사 뒀다. 장춘행 비행기 출발 시간이 오후 4시 30분인지라, 그때까지는 연길에 머무를 수 있었다.

어제 밤늦도록 강행군한 탓에 쌓인 피로도 풀 겸 늦잠을 자려고 했으나, 5시에 눈이 떠졌고, 더 이상 좀이 쑤셔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옆방의 김 선생, 이 선생도 일찍 일어나셨다.

일정을 상의한 결과, 오전에는 연길 시내를 둘러보기로 하고 12시에 빈관으로 돌아와 짐을 꾸려 방을 비운 뒤, 프론트에다 짐을 맡기고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점심 식사와 여가 시간을 갖기로 했다.


7시에 찬청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했다. 빈관에서의 아침 식사는 빵과 수프, 양배추김치 뿐으로 간단했다. 빵은 아무 것도 넣지 않은 덩어리로 꼭 생김새나 크기가 목침과 같았다. 하지만 보기보다는 맛이 담백해서 아침 요기로는 충분했다.

중국에서 먹는 음식은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중국요리와는 다르다. 본토 중국 요리가 입에 익지 않은 사람은 중국 음식에 거의 빠지지 않는 씨앙차이〔향채(香菜)〕냄새가 아주 역겹다.


a 베이징 근교 만리장성에서 (오른쪽 김중생, 필자)

베이징 근교 만리장성에서 (오른쪽 김중생, 필자) ⓒ 박도

이번 항일 유적답사 팀장은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의 손자인 김중생 선생이다. 연세도 가장 많기도 하지만(1933년생),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서 북만주 취원창에서 학교를 다녔고, 조선의용군 제3지대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그 후 주하(현 상지)현 조선 중학을 다닌 후, 한때는 인민군으로 참전도 했고, 다시 중국으로 귀국하여 가목사 사범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중학교 교원을 역임하는 등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1987년 독립운동가 유족 제1호로 귀국하여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

50여년을 중국에서 사셨기에 - 당신의 이름 중생(中生)은 중국 태생이란 뜻임- 중국말도 익숙하고 지리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답사기간 중, 매끼 음식을 주문할 때 당신 취향과 기사 입맛에 맞추다 보니 향채 냄새가 나는 음식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당신은 오랫동안 중국 땅에서 살았기에 오히려 중국 본토 음식이 잘 맞았지만, 나와 이 선생은 영 맞지 않아서 서울에서 준비해 간 고추장을 꺼내서 비벼 먹곤 했다.

나도 웬만큼 먹성이 좋지만, 중국식당 특유의 칙칙한 분위기와 야릇하고 강한 향채 냄새는 먼저 코에서부터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중국 식당에서는 무슨 음식이든 접시에 넘치도록 푸짐하게 담아 나온다. 우선 철철 넘치는 양에 그만 질려 버린다. 대체로 값도 엄청나게 쌌다. 우리나라 돈으로 1만원 정도면 서너 사람이 반주까지 곁들여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은 그동안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익은 말이지만, 국외에 나가면 온몸으로 느껴지는 명언이었다. 제 땅, 제 음식이 제일 좋은가 보다.

8시, 몸살 기운이 여태 가시지 않았다는 김 선생님은 빈관에서 계속 쉬겠다고 하기에 이 선생과 함께 나섰다. 연길 일대는 조선족 자치주라서 굳이 중국말을 몰라도 큰 불편이 없었다.

이곳 주민의 약 40%가 조선족이고, 택시 기사들도 웬만큼 우리말을 알아들었다. 거리 간판은 모두 한글 한자를 나란히 쓰기에, 마치 1970년대 한국의 도시를 찾아온 기분이 들었다.

설사 한족을 만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크게 불편함은 없다. 아주 급한 일은 만국 공통용인 손짓 발짓으로 다 통한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한자로 필담을 나누면 크게 불편함이 없다.

a 연길 시가지, 세 바퀴 자전거와 승용차, 사람이 뒤섞였다.

연길 시가지, 세 바퀴 자전거와 승용차, 사람이 뒤섞였다. ⓒ 박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움츠러들 필요는 조금도 없다. 익히 알고 있는 몇 단어로도 응용해서 아쉬운 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쇼핑을 할 때 믿을만한 곳은 주머니 돈을 꺼내주면 자기네들이 알아서 셈해 간다.

먼저 찾아간 곳은 연변 조선족 민속박물관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개관 전 청소를 하고 있었지만, 복무원은 개관 시간 전이라고 문전 박대하지 않고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박물관은 들머리 정면에 연길 조선족 자치주의 지도와 차트로 연변 조선족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줬다.

중국 전역에는 조선족 약 200만여명이 소수 민족으로 살고 있으며, 이곳 연변조선족 자치주에만 86만여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에는 조선족 인구가 39%나 되고, 연변자치주 인민정부 간부 중에 조선족이 45.1%, 혁명열사가 1만5970명이나 된다고 했다. 이곳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조선족이 한족 못지 않게 당당하게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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