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곡에는 치료하기 어려운 불치병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붕당(朋黨)이라는 것이다. 과거에도 붕당 때문에 선무곡은 수없이 망할 위기를 겪었다.
비근한 예가 바로 임진년에 있었던 왜문의 침탈이다. 당시 선무곡주는 왜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판단하여 일단의 통신사를 파견한 바가 있다.
이때 보내진 사람은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이었다. 우송서생(友松書生) 황윤길(黃允吉)은 서인이었고, 학봉서생(鶴峯書生) 김성일(金誠一)은 동인쪽 사람이었다.
왜문을 돌아보고 온 직후 황윤길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왜문을 돌아본 즉 본곡을 침탈하려는 의도가 엿보였으니 이에 단단한 방비태세를 갖추어야 마땅할 것으로 사려되옵니다."
조만간 병화(兵禍)일어날 것이라는 보고였다. 이 말에 크게 놀란 사람들은 부사 김성일을 바라보았다. 정사의 말이 맞느냐는 의도에서였다. 이때 김성일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무슨 말씀을…! 소생이 보아하니 왜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사옵니다. 정사께서 뭘 잘못 보신 모양이옵니다."
너무도 당당한 태도였기에 선무곡 수뇌부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는 황윤길에게 괜한 분란을 자초하려 하였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였다. 당시에는 동인의 입김이 훨씬 셀 때이기에 그의 말은 묵살되고 말았다.
보고가 끝난 이후 당시 선무곡 제일호법이었던 서애학사(西厓學士) 유성룡(柳成龍)은 김성일을 불렀다. 둘은 같은 스승 아래에서 학업을 닦은 사이였기에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보시게. 자네의 말이 정녕 사실인가? 짐작컨대 변고가 있을 듯한데 자네가 아무 일도 아니라니 이상해서 묻는 것이네. 혹시 병화가 발발하면 장차 어떻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였는가?"
이에 김성일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소생도 어찌 왜문이 끝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정사의 말이 너무 중차대하고 충격적이므로 온 곡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였을 따름입니다."
이 말은 성급한 전쟁설로 혼란이 일어날까 우려한다는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허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당시 서인과 동인은 사사건건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서인이 하늘이 파랗다고 하면 동인들은 시뻘겋다 하였고, 만산을 뒤덮은 백설을 보고 희다고 하면 검다 할 정도였다.
다시 말해 황윤길이 전쟁의 기미가 보인다고 하자 무조건 반대하기 위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 것이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이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왜문으로부터 선무곡 침략에 관한 보다 확실한 정보가 전해졌다.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이 왜문의 문주를 접촉하는 과정에서 왜문이 선무곡의 길을 빌려 화존궁을 치려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오억령은 급한 심정으로 이를 보고하였으나 어처구니없게도 파직(罷職)당하고 말았다.
그는 서인이었고, 여전히 권력이 동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일이 있은 직후, 이번엔 선무곡과 왜문 사이에 있는 대마헌(對馬軒)의 헌주 종의지(宗義智)가 찾아와 왜문에서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이 사실을 화존궁에 알리고 이를 평화롭게 수습하여야 할 것이라 거듭 간청하였다.
대마헌은 선무곡과 왜문 사이에 있으면서 두 문파 간의 교역이나 물자 교류에 개입함으로서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헌주로서 가급적 전쟁을 피하고자 왜문 사람이면서도 선무곡에 사실을 고변한 것이다. 하지만 이 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설사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동인인 김성일과 그 일당이 그동안 내뱉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서인의 말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면 권력 기반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종의지의 간청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면서 묵살한 것이다.
당시 선무곡의 수뇌부들은 곡의 장래가 어떻게 되든 말든 무조건 붕당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 사건이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결국 임진년에 이르자 왜문의 침탈이 시작되었다. 이때 충무신군(忠武神君) 이순신(李舜臣) 같은 몇몇 걸출한 고수가 없었다면 선무곡은 오래 전에 왜문에게 먹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임진왜란이라 일컬어지는 그때 이순신의 빛나는 전공 가운데 더욱 빛나는 전공이 있다.
그것은 인류 전쟁사(戰爭史)에 다시없을 엄청난 대첩이었다.
불과 열두 척의 병선으로 열 배가 넘는 일백삼심삽 척의 전함과 맞서 적들을 전멸지경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명량대첩(鳴梁大捷)이라 일컫는다.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옥포(玉浦), 사천포(泗川浦), 당포(唐浦), 적진포(赤珍浦), 당항포(唐項浦)에서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으며, 한산도 앞 바다에서는 한산대첩(閑山大捷)이라는 또 다른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로도 안골포(安骨浦), 부산포(釜山浦), 웅천(熊川), 장문포(長門浦) 등지에서도 왜문의 병선들을 무참하게 격파하였다.
이에 왜문 사람들은 이순신이 무서워 배를 탈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바다에서는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오래 전 청해진을 발판으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던 해상왕 장보고와 버금갈 해신(海神)이 된 것이다.
덕분에 전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즈음 충무신군의 혁혁한 전공에 배가 아파진 원균(元均)은 그를 모함하였다. 그 결과 이순신은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그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뻗은 손길이 있었다.
당시 선무곡 제일장로였던 정탁(鄭琢)이 그를 구명한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모든 직책은 박탈당했지만 백의종군하였다.
얼마 후 왜문에서 다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겠다고 나섰던 원균(元均)은 수많은 병선과 제자들을 동원하고도 참패하고 말았다. 다급해진 곡주는 충무신군에게 다시 나서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선무곡에는 수군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고, 병선(兵船) 또한 얼마 없었다. 그 많던 병선들을 원균이 혼자서 몽땅 말아먹은 것이다. 그래서 달랑 열두 척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부서진 병선을 수리하랴, 흩어진 수군들을 다시 모으랴 정신이 없을 즈음 이순신은 곡주로부터 하나의 첩지를 받았다.
수군을 해체하고 뭍에서 왜문 제자들을 상대하라는 것이다.
이에 수군의 존재 당위성을 설파한 상소를 한 끝에 간신히 허락을 받은 이순신은 이 열두 척의 병선으로 명량대첩이라는 전쟁사에 다시없을 대첩을 세운 것이다.
이후에 있었던 것이 바로 노량해전(露粱海戰)이었다. 이 전투에서 충무신군은 유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만일 충무신군의 전공을 시기하여 그를 모함하였던 원균만 없었다면 임진년에 선무곡에 발을 들여놓았던 모든 왜문 제자들은 씨도 남기지 못하고 몰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선무곡과 왜문 사이의 바다를 걷어서 건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해권(制海權)을 선무곡에서 완전히 장악하였을 것이기에 설사 배를 탔다 하더라도 모두 수장(水葬)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다면 겁이 나서라도 왜문은 다시는 선무곡을 넘보지 못했을 것이다.
죄 값 때문인지 원균은 왜문 제자의 손에 목이 잘려죽는 참사를 겪어야 하였다. 그가 아무 죄도 없던 충무신군을 모함하여 사형 언도까지 받게 한 이유는 소속된 붕당이 다르다는 이유였다.
붕당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