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48

제세활빈단(制世活貧團) (1)

등록 2003.06.02 13:47수정 2003.06.0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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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세활빈단(制世活貧團)


현재의 선무곡은 과거에 있던 동인과 서인이 아닌 다른 의미의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으르렁대고 있었다.


과거에는 누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어떤 생각을 지녔는가가 분류 기준이었으나, 지금은 단지 동쪽에 살고 서쪽에 산다는 이유로 나뉘어 있었다.

무림천자성이나 화존궁에 비하면 문간방도 채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문파이면서도 동서로 나뉘어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계속하여 동인 쪽에서 곡주가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선무곡 역사상 처음으로 서인 출신인 대중존자가 곡주에 선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전임 곡주였던 영삼서생(零三書生)의 거듭된 실정(失政)으로 곡의 재정이 피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 비리에 깊숙이 연루되었다는 것이 알려져 곡도들의 공분(公憤)을 산 탓이다.

그래서 대중존자 취임 초기에 선무곡에서는 유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북선무곡과의 혈전 이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극도의 궁핍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대대로 전해지던 가업(家業)이 망가져 패가망신(敗家亡身)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여 여기저기에서 시름에 겨운 한숨과 탄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본시 선무곡에는 거렁뱅이가 없었다. 전에는 있었지만 살기 좋아지면서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곳곳에서 문전걸식(門前乞食)하는 사람들이 다시 생겨났고, 거처(居處)마저 없어 한(寒) 데서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신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구휼의 손길을 펼쳤다. 그렇기에 여전히 여파가 남아 있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지만 그나마 영삼서생이 남긴 상처는 어느덧 치유되어 가는 중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인근에 있던 다른 군소방파들도 거의 비슷한 곤란을 겪었다. 그들 역시 회복되어 가고 있었으나 선무곡의 회복속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비롯하여 구파일방 등 다른 방파들은 놀라운 속도로 곡의 상황을 재정립시키는 선무곡 사람들을 보면서 그저 탄복의 눈길을 보낸 바 있었다.

그것은 선무곡 사람들만의 독특한 기질 때문이었다. 평상시 선무곡 사람들은 마치 마른 모래알 같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같은 혈족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거나 시기 내지는 질투를 하여 융합이나 단합이 잘 되지 않는다. 아예 반목과 질시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어떤 특수한 경우에 부딪치면 놀라울 정도로 바뀐다. 언제 모래알 같았느냐는 듯 일치 단결하여 처한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내는 것이다.

별 볼일 없는 선무곡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곡의 재정이 극도로 빈궁하며, 이로 인하여 자칫 곡의 모든 재산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선무곡 사람들은 끼고 있던 금가락지며, 금비녀 등 모든 금붙이를 내놓았다. 그것을 팔아 급한 빚은 갚고, 대외신인도를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전 무림이 경탄의 눈길을 보냈다. 무림 역사상 이렇게 대단한 문파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덕인지 선무곡의 위기는 잦아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또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하였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가고,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도 여실히 증명하는 일이었다.

이런 지랄 같은 성정으로 인한 대립과 반목은 신임곡주를 선출해야 할 시기에 이르자 극에 달해 있었다.

자신이 밀고 있는 후보가 차기 곡주가 되지 않으면 전 재산을 잃고 알거지가 되기라도 한다는 듯 으르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공개석상에서 내뱉은 광견녀 감련혜의 한 마디는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기에 단 하루만에 미친 개 같은 년이라는 향기롭지 못한 외호를 얻은 것이다. 그때 그녀가 먹은 욕은 그녀가 평생 먹을 욕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나마 그러고도 그녀가 지지하였던 청죽수사가 차기곡주가 되었다면 어쩌면 괜찮았을지 모른다. 오히려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리로 영전(榮轉)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였다. 그녀가 그렇게도 반대한다던 일흔서생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불거리던 입을 닫고 어디론가 잠적해버렸다.

아마도 그녀는 다시 서당의 훈장 노릇하기 어려울 것이다.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이며, 설사 무언가를 가르치려 한다 한들 제자들이 스승으로 받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감련혜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다시 학동(學童)들 앞에 서려한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의 극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회옥은 괜스레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과 같은 혈족인 선무곡 사람들은 분명 대단히 우수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개 같은 성정 또한 가지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더 잘 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시라도 붕당을 만들어놓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지 않으면 좀이 쑤셔하는 개 같은 성질 때문에 은근히 화가 났다. 그것만 없었다면 오늘날 요 모양 요 꼴은 면했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요즘 번창일로를 걷고 있다는 왜문이나 유대문보다도 더 강한 세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지난 세월 내내 선무곡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던 화존궁보다도 더 강한 문파가 되었거나, 아니면 화존궁 자체를 복속 시켰을지도 모른다.

나아가서는 전 무림을 상대로 정의를 수호한다는 미명 하에 내놓고 온갖 깡패 짓을 다하는 무림천자성을 능가하는 위대한 문파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열이 뻗친 것이다.

"제기랄! 젠장! 빌어먹을! 에이… 쓰버랄!"
"어? 갑자기 그래요?"

"응? 그게… 참, 넌 벙어리잖아."
"어맛! 흡!"

이회옥이 계속해서 상스러운 소리를 해대자 조연희는 웬일인가 싶어 말을 걸었다가 얼른 제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주변 사람들은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지라 아무도 눈치챈 사람이 없는 눈치였다. 하마터면 벙어리가 아니고 사내도 아니라는 것을 들킬 뻔한 순간이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고, 은자에 욕심이 있는 자라면 수상한 남녀를 무조건 신고할 것이다. 이회옥과 조연희의 목에 자그만치 오천 냥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요. 왜 그렇게 저속한 말을 해요?"
"후후! 미안…"

자신의 실수가 민망하였지만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듯 슬그머니 속삭이는 조연희를 보며 미소짓던 이회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뒤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 하나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귓가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이제 그만 허기를 메웠으면 밖으로 나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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