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는가 싶어 여기저기를 바라보던 이회옥의 시선은 다시 그 사내에게로 향했다.
다른 좌석에 있는 사내들은 모두 술이 제법 되어 불콰하게 취해 있거나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그 사내만은 자신을 주시한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색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나오시게."
"……?"
또 다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무림의 고수들만이 시전할 수 있다는 전음(傳音)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시끄러운 곳에서 그처럼 선명하게 들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고개를 돌려 다시 주변을 살핀 뒤 자신을 바라보던 사내를 바라보려던 이회옥은 순간적으로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헉!"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바라본 것은 불과 일 수유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기처럼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는 주청의 입구에서 적어도 열 발짝은 떼어야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빨리 나간다 하더라도 눈에 뜨일 터인데 보이지 않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으으음!"
이회옥은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고는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이보시게 순찰! 어서 안 나오시고 무얼 하시나?"
"……!"
또 다시 들리는 전음에 이회옥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무곡에는 순찰이라는 직책이 없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모른 채 주객들의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조연희는 이회옥의 어리둥절한 태도를 보고 심상치 않다 느꼈는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이제 배도 부르고 하니 이만 나가자."
"……?"
여인의 직감으로 이회옥이 뭔가 서두르는 듯하며 초조해한다는 것은 느낀 조연희는 대체 왜 그러느냐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회옥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망태와 죽장을 집어들고 있었다.
잠시 후, 이회옥을 따라나선 조연희는 그가 잠시 멈췄다가 마치 어딘가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걸어가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들이 없다면 소리내어 물어보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주변엔 선무곡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흐음! 궁주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월마교의 교주 암흑제왕 상희태의 물음에 굳게 닫혀있던 화존궁의 궁주 구화무존 간택민의 입술이 열렸다. 비밀리에 행해지는 이 회동은 당금 무림에 크나큰 파장을 몰고 온 주석교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화산파와 점창파가 나서서 월빙보 공격을 반대하고 있으니 무림천자성도 쉽게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외다."
"궁주께서는 그들이 반대한다고 철룡화존이 뜻을 굽힐 것이라 생각하시오? 무림천자성이 대체 어떤 곳이오? 놈들은 같은 정파라 할지라도 반드시 보복할 것이오."
"으음!"
"보나마나 화산파에 있던 화산분타는 철수시키고, 점창파의 특산물인 포향주(葡香酒)의 반입을 중지한다 발표할 것이오."
"맞소이다. 철룡화존 구부시는 충분히 그런 결정을 내리고도 남을 위인이오. 흠! 같은 정파이면서도 그러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간악(奸惡)하다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화존궁주 간택민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맞소이다!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도 놈 때문에 있는 말일 것이외다."
"흐음! 그런 판이니 본궁이 나서서 반대한다하면 본궁 또한 보복 당할 것은 뻔한 일. 놈들이 상권(商權)을 거머쥐는 동안 다른 일에 신경 쓴 것이 너무도 통탄스럽소이다."
"그건 본교 또한 마찬가지외다. 예전처럼 휘하에 세력을 결집시켜두고 있었다면 무림천자성이 이처럼 내놓고 날 뛰지는 못하였을 터인데… 이럴 땐 고루비가 정말 원망스럽소이다."
일월마교의 교주 상희태는 전대 교주였던 고루비(高陋翡)가 원망스러웠다. 왕년의 일월마교는 명실상부한 마교의 종주였다.
그때에는 휘하에 수많은 군소방파들을 거느리고 사사건건 무림천자성과 대립할 능력이 있었다. 화존궁도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지만 이때에는 상대가 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화존궁의 오늘날도 따지고 보면 일월마교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마공이 있기 때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무림천자성으로서는 눈에 가시와 같았지만 힘으로 대등한 일월마교와 건곤일척(乾坤一擲)을 벌이기엔 너무도 위험 부담이 컸기에 웬만한 일에서는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는 것으로 매사를 매듭지었었다.
맞부딪치면 둘 다 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대교주였던 독두고도(禿頭古圖) 고루비가 지금껏 휘하 군소방파들을 장악할 수 있던 권력의 원천인 장문 영부를 모두 돌려주는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에 깜짝 놀랐다. 전혀 상상치 못하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용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일월마교는 모든 악행의 근원으로 인식되던 곳이었다. 하여 일월마교라는 호칭만으로도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과 더불어 공포감를 느끼게 하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악의 굴레를 스스로 벗겠다고 하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무림천자성에서 모종의 공작을 하였기에 대머리에 마치 오래된 지도가 그려져 있는 듯하다 하여 독두고도라 불리는 그가 할 수 없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설도 있고, 막대한 은자를 제공받아 그랬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튼 이일로 인하여 일월마교의 힘은 크게 약해졌다. 그 결과 화존궁과 비슷한 정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속담에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먹고산다는 말이 있다.
제아무리 세력이 크게 줄었다 하더라도 일월마교는 여전히 무시 못할 존재였다. 보유하고 있는 천뢰탄의 수효와 휘하 고수들의 무공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주석교가 선무곡을 침범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일월마교와 화존궁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커나가는 무림천자성이 못 마땅하였지만 그들과 정면대응을 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서로의 눈치만 살펴서는 안되겠다 싶어 선택한 것이 바로 주석교와 선무곡을 내세운 대리전쟁이었다.
이때 일월마교와 화존궁, 그리고 무림천자성은 선무곡과 주석교에 자신들이 새로 개발한 병장기를 대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가르쳐줄 제자들 또한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정도 모르는 선무곡과 주석교는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싸웠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개전(開戰)된지 삼 년만에 무림천자성과 일월마교, 그리고 화존궁은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휴전을 선언하였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른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일이 있은 이후 일월마교와 화존궁은 주석교의 후견인 노릇을 하였다. 주석교는 마땅한 수입원이 없기에 그냥 내버려두면 전 제자들이 아사하거나 선무곡에 먹혀 버릴 것이다.
그런데 선무곡에는 무림천자성에서 파견한 선무분타가 있기에 그렇게 되면 턱 밑에 칼을 들이댄 꼴이 되기 때문에 싫어도 할 수 없이 후견인 노릇을 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주석교가 무림천자성과의 대결에 있어 일종의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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