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우리집 모내기하는 날 풍경

<농번기와 영농7>1974년 그 해 우리 집 2모작 모심는 날 오전

등록 2003.06.03 12:22수정 2003.06.0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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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모내기.  허리 아파도 20여일은 죽어라고 일을 해야 합니다.

모내기. 허리 아파도 20여일은 죽어라고 일을 해야 합니다. ⓒ 농협

첫닭이 울자 깨어난 온 집안 식구들


아침이 밝아 오려면 한 참을 기다려야 한다. 새벽 6시가 안 된 시각. 백아산(810m. 전남 화순 북면에 있는 산) 동쪽 평지마을 하늘에 먼동이 트려면 아직 이르다. 바짝 긴장한 탓인지 깊은 잠에 빠질 수 없었던 온 가족은 아버지의 기침 소리 한 번에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는 첫 닭이 울자 소죽을 쑤고 계셨다. 잠 많기로 소문난 어머니와 우리들이지만 이 날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한시도 머뭇거릴 수 없는 대행사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축도 깨어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을 나서야만 하니 이리 저리 지시하고 명령할 틈도 없다. 각기 맡은 소임을 해나가고 힘에 부치면 구원을 요청하면 되니 잘 훈련된 군대에서나 가능한 아침나절이 시시각각 흘러간다.

이런 날은 밥을 굳이 먹지 않고서 들로 나가는 게 정상인데 어제 가족끼리 하다 멈추고 들어왔으므로 모찌던 논으로 나갈 약속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쟁기와 써레를 논에 두고 오셨다. 빈 지게를 지고 소만 몰고 가시면 된다.

어머니와 누나는 밤새 장만한 반찬과 새로 무칠 나물을 준비하고 가마솥에 쌀을 앉혀 놉 스무 명에 식구 여덟이 먹을 양을 군불 때 밥을 하느라 정신 없다. 집에 작두 샘이 없어 냇가 우물터에 나가 물을 길러다가 밥을 해야하지만 오늘 누나는 옆 집 큰댁으로 달려가서 길러 온다. 오늘도 막내 여동생은 큰 댁 할머니께 맡겼다.

a 잠시 휴식 중 마시는 막걸리 농주.

잠시 휴식 중 마시는 막걸리 농주. ⓒ 김규환

못 줄 챙겨나가는 아이


형들도 집에서 담근 농주(農酒)가 한 말 밖에 안되어 부족한 터에 마을 앞까지 세 발 자동차가 (*)‘포도시’ 배달한 둥그런 통에 담긴 막걸리 한 통을 지고 새 김치 조금을 덜어 막걸리 잔 서너 개만 준비하여 급히 논으로 나간다.

나는 염소를 가까운 밭가에 매어두고 일부터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어제 밤늦도록 빨간 꽃이 나일론 못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줄줄이 제자리에 매달려 있었는가를 확인하고 빠져나가고 없으면 어머니 붉은 내복을 잘라 끼워 넣어 다시 감아놓았던 못줄을 챙겼다. 재작년까지 썼던 나무 말뚝은 이제 닳고 삭아서 부러지고 말았으므로 작년부터는 성냥간에 가서 쇠말뚝을 네 개 쳐왔으니 앞으로는 몇 해고 두고두고 쓰면 되었다. 그렇게 챙긴 못줄은 두 쌍이었다.


“엄마 나 나가요~”
“잊지 않고 다 챙겼냐?”
“하믄이라우~”
“거시가 아부지 막걸리 따로 챙겨각고 가거라와~”
“알았어라우~”

a 품앗이로 농사의 대부분을 했고 여성들이 모내기는 훨씬 잘 합니다. 남성들은 막걸리 먹다 해 떨어지지요.

품앗이로 농사의 대부분을 했고 여성들이 모내기는 훨씬 잘 합니다. 남성들은 막걸리 먹다 해 떨어지지요. ⓒ 농협


때 맞춰 못자리로 나와 모찌는 데는 1시간도 안 걸려

정확히 몇 시 까지 나오란 약속은 없었다. 하지만 동네에서 얻은 놉들 열 일곱은 거의 같은 때에 맞춰 나왔는데 가장 늦은 부들댁이 6시 반이었다. 연바람댁, 학천댁, 봄면댁, 수산댁, 입면댁, 동복댁, 오산댁, 산덕댁, 정산댁, 원리댁, 길성댁, 송단댁, 양지댁, 기동댁, 담양댁, 곡성댁, 부들댁 까지 다른 집으로 가게 된 세 분 말고는 한 분도 나자빠지지 않고 다 나왔다. 옆 마을 강례에서도 세분이 오셨다.

한 동네에서 우리 집과 승호네 두 집이 한 날에 모심기를 하게 되었다. 그 애 집은 묵갈림이라는 소작이 적어 열 마지기이므로 사람이 열 두어 명쯤 돼 보였지만 우리집은 열 닷 마지기가 넘으므로 이 인원은 족히 필요하다.

“부들떡 이리 늦당가?”
“쩌기 소로골 논에 댕겨오니라고...물이 모자라서 논을 갈 수가 있어야 말이제.”
“하여간 부들떡은 부지런 하당께.”

“정산떡! 지비꺼는 언제 숭군당가?”
“직아부지가 글페 숭굴것이라 헌디 모르것구먼~”

무리 중에는 열여덟에 이웃 마을에서 시집 온지 두 해도 안되어 집에서 사랑이나 듬뿍 받아야 할 새색시 티를 아직 못 벗은 금반댁 둘째 며느리도 시어머니 대신 나왔다.

-“어이 새댁! 신랑이 잘 해 준당가?”
“뭔 말이다요. 모나 숭굿쇼.”
-“참말로 곱구만...신랑한테 사랑받겠어.”
=“쭈글쭈글한 나도 저런 이팔청춘 때가 있었는디~”
-“세월이 쥑일 놈이랑께라우~”
=“아따 거시기~”
“...”(긁적긁적)
-“...”
=“...”

어제 못다 찐 못자리에서 벌떼처럼 엉겨붙은 인부들. 질펀한 아짐들의 농담은 아예 엿듣지 못했다.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절반 이상 남은 것을 벌써 다 쪄 나간다. ‘그래 일이란 게 이런 거구나!’ ‘규모의 경제와 손에 익은 사람이 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못자리에는 골라낸 피, 도사리, 대패지심, 가래, 왕골 따위가 둥둥 떠 있다.

논 밖으로 김을 던지던 형제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쪄 둔 타래를 못자리 밖으로 툭툭 던져 놓기도 바빴다. 물이 조금 빠지자 남자들 넷은 각자 지게에 한 짐씩 지고 떠났다. 아짐들은 자신이 묶은 모 타래에 건져 놓은 것을 한 손에 네 단씩 여덟 타래를 움켜쥐고 우리 뒤를 졸졸 따랐다. 줄줄이 논두렁길을 따라 오는 그 광경은 이곳 백아산 아래에서는 6. 25 당시 빨치산과 국방군 간의 치열한 공방이 있던 다음으로 최대 인원이라 할 만 했다.

써레질을 한 번 더 하신 아버지께서는 모를 다 찐 못자리를 갈 차례다. 못자리는 무른 땅이라 한 번만 갈고 써레질을 하면 대강 끝난다. 그러고 나서 못 줄을 잡으시던가 구경나온 동네 상투 튼 노인들과 농악을 치는 사람들 술시중을 들면서 풍악을 울리면 된다. 아버지는 둘도 없는 상쇠였다.

a 논두렁을 잘 붙이면 풀도 더디나고 뱀이 뚫어 둔 구멍에 방천(放川) 날 일도 적도 콩도 심으니 한 두가지 잇점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요즘은 예초기로 자르거나 제초제를 쳐버리고 말지요.

논두렁을 잘 붙이면 풀도 더디나고 뱀이 뚫어 둔 구멍에 방천(放川) 날 일도 적도 콩도 심으니 한 두가지 잇점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요즘은 예초기로 자르거나 제초제를 쳐버리고 말지요. ⓒ 김규환

장구배미에서 모내기 시작

형제들은 논두렁 위쪽에서 각자 지고 온 모를 최대한 힘을 주어 적당한 간격으로 던져 놓고 바로 논두렁 붙이기에 들어갔다. 어디고 논을 갈 때 바로 논두렁 붙이기를 해야하지만 이번에는 바빠서 마저 끝내지 못했다. 당연히 우리 몫이었으니 무릎을 꿇고 논바닥에 있는 된 흙을 먼저 끌어다가 붙이고 주변에 있는 흐물흐물한 흙을 덧바르고 싹 문대가며 뒷걸음질치면 되는 힘겨운 노동이다. 모내기가 끝나면 덜 굳은 상태에서 논두렁 콩을 심어야 한다.

구불구불 뱀처럼 생겼고 보기에 따라서는 장구처럼 생긴 기다란 논배미는 못 줄 띄우기가 사납다. 그래도 두 번 세 번 나눠서 하면 된다. 그러하매 이 집 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논매기 할 때를 생각하고 물이 들어올 방향을 보아 첫 구획을 잡으면 된다. 농촌지도소 직원과 면서기들이 들판마다 다니며 줄 모인 정조식(正條植)을 하라 하는 터에 이렇게 하기도 채 10년이 안되었다.

논 생김새를 파악한 뒤 쏘옥 들어간 언덕배기 쪽으로 툭 잘라 띄운다. 그 안쪽으로는 다섯 사람이 들어가서 뜬 모 하듯 일정치 않은 간격으로 마구 꽂아버리고 합류하면 된다. 다음으로 직각이 되게 못 줄 하나를 길게 띄워놓고 하나로 그 간격을 기준 삼아 뒤로 후진하며 두 칸을 한 번에 심어 바깥쪽은 빨간 꽃 바로 앞에 꽂고 안쪽 줄은 앞줄을 기준으로 같은 간격으로 심어나가면 되었다.

잠시 가닥을 잡느라 별 소리가 없더니,

“줄이야~” 소리에 일제히 사람들 손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앗따 귀때기 터지겠구만이라우~” 기동댁이 “히히히” 웃으며 말했다.

논갈이를 마친 아버지와 동네 남정네들로 짜여진 농악대와 환갑(還甲)이 되려면 5년이나 남은 동네 최장수 노인이자 상투 올린 영감님까지 몰려왔다. 꽹과리, 징, 장구에 북대신 소고(小鼓)가 몇 개 들려 있다. 태평소 소리도 “삐이~삘리리이~” 소리를 내며 흥을 돋군다. 한참 동안 긴 논두렁을 돌아 지신을 깨우더니 다시 돌아와서는 육자배기에 벌써 풍년을 노래한다. 소강상태로 이끈 아버지께서는 “모다 나오셔서 탁주나 한 사발 허고 허싯쇼~”

a 미류나무가 있는 걸 보니 70년대 초반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장면을 목격했거든요. 상투 쓴 어른이 마을마다 한두 분 남아 있었지요.

미류나무가 있는 걸 보니 70년대 초반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장면을 목격했거든요. 상투 쓴 어른이 마을마다 한두 분 남아 있었지요. ⓒ 장성군

풍악소리 요란하고 풍년가를 벌써 부르네...

남자들 따로 부인들 따로 모여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고 본격적으로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모내기는 발보다 손이 빨라야 한다. 발이야 띄엄띄엄 길게 옮길 수도 있지만 손이 따라오지 못하면 제 아무리 발걸음이 빨라도 갈 수가 없다. 왼손에 쥔 모를 오른 손이 잘게 갈아진 흙 속에 툭툭 찔러 넣는 사이 이미 왼손에서는 엉겨붙은 모 뿌리 서너 개를 떼고 밀쳐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걸 새가 모이를 톡톡 쪼아먹듯 잽싸게 가져와서는 톡 꽂아야 한다. 밀치고 꽂고 밀치고 꽂고 이런 반복적인 일을 하려면 오른 손보다 왼손 놀림이 더 바쁘다. 그래서 혹간 왼손잡이가 있으면 손발 맞추기가 힘들다.

‘못줄잡이’가 양 끝 논두렁에 적당한 간격으로 대기가 무섭게 같이 붙어 있던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해 급히 딴 사람을 만나러 가는 형국이니 요즘 모(某) 광고에 나오는 멀어져 가는 한 사람과 다가오는 한 사람을 연상하면 쉬 이해 할 수 있다. 얼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찍고 나서 안쪽을 심으며 제자리로 되돌아 와야 하니 잠시도 한 눈 팔기 힘들다.

a 모내기. 줄모가 아닌가 봅니다. 일도 바빠 죽겠는데 면서기들이 맨날 들볶으면 쳐 박아 버리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모내기. 줄모가 아닌가 봅니다. 일도 바빠 죽겠는데 면서기들이 맨날 들볶으면 쳐 박아 버리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 장성군

“줄이야!” “줄!” 소리에 맞춰 심어 나가려면 왼손이 빨라야...

더군다나 모 타래가 너무 멀리 있거나 잘 풀리지 않을 경우 당할 낭패는 심하다. 다음 공정에까지 지장을 주므로 그런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며 주위를 살펴야 한다. 느릿느릿 심어 가는 몇 사람이 있으면 이내 못 줄 잡은 이는 “줄!” 하며 못 줄을 확 채서 걷어 버리니 가슴팍으로 못줄이 튀면서 흙탕물을 튀기기는 일이 잦았다.

이 때는 나 같은 모쟁이나 보조자의 구실이 절실하다. 모가 너무 배게 촘촘히 있으면 듬성듬성 놓을 필요가 있다. 풀리지 않은 타래를 뒤쪽으로 멀찌감치 던져두고 성기게 떨어져 있으면 더 가까이 모 타래를 툭툭 던져줘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아짐들 엉덩이에 물이 툭 튀게 마련인데 “아이 차가워~. 저 총각(애)이 누구 방뎅이를 건드려~?” 하며 농을 걸어오기 십상인데, “참말로 죄송하구만이라우~ 조심허께라~”하고 빠져야 한다. 괜히 동네 아짐이 말 걸어온다고 말 받았다가는 일이 더디 된다고 어른들 호통이 떨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a 개구리 밥이라고 했던 수초가 둥둥 떠 있었습니다.

개구리 밥이라고 했던 수초가 둥둥 떠 있었습니다. ⓒ 김규환

모쟁이 노릇하다 오전 새꺼리를 가지러 집으로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 다녀와야 했다. 바지게에 발채를 얹어 갔다. 이런 대부대가 먹으려면 그릇 수만 해도 각기 두 개 씩에 숟가락 젓가락 포함하면 어지간하지가 않다. 모내기철에는 제사 때 보다 더 걸고 가짓수도 많으니 머리에 이는 걸로는 어림없다. 놋그릇이야 집에서 먹을 때나 먹었지 사기 밥그릇에 사기 국그릇이었으니 그 무게가 보통이던가.

바지게에 미리 내놓으신 걸 올려 싣고 집을 나섰다.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따라 밥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 받친 채 남은 한 손엔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오는 누이가 눈에 들어온다. 작대기로 받쳐두고 달려가서 하나를 받아왔다. 비싸리로 만든 광주리에 2, 2층을 올려 멀찌감치 뒤따라 온 어머니는 수건을 똬리로 만들어 가득 이고 양손에도 더 들려 있다.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큰 일이지만 사뿐사뿐 잘도 오신다. 이번에는 셋째형이 달려가 손을 자유롭게 해 드렸다. 마침 정지동 노송(老松)이 그늘이 져서 밥 먹기 좋은 곳에 어머니 무거운 짐을 내려드렸다.

a 풍년초라고도 불리는 개망초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했습니다.

풍년초라고도 불리는 개망초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했습니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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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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