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냄새 따뜻한 곳의 '남 모르는 아픔'

[새벽을 여는 사람들-19] 춘천 우시장에서 만난 이용범씨

등록 2003.06.04 12:30수정 2003.06.06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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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남춘천 역에서 정족리 쪽으로 1.2km를 들어간 곳에는 1976년에 개장해 일일 평균 거래가 250두 내지 300두였던 3300평 면적의 우시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화되는 시간 앞에 영원한 강자는 없는가 봅니다. 북적거리는 장터의 활기 대신 춘천 우시장엔 주민들의 불만 섞인 민원이 무시로 들어옵니다.

영서 지방 최대 규모의 춘천 우시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빼곡이 둘러싼 아파트와 골프장 사이에 위치한 우시장엔 강원도와 경기도, 충청도 업자들까지 왕래한 과거의 그 찬란했던 흔적이 희미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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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xx야, 언능 와 대포 한잔해야지!"
"앗따, 저 xx 뭔넘의 해장을 아침부터 하노?"
"이 넘의 xx, 내가 니를 오늘 아니면 또 언제 볼끼고? xxxx 다물고 언능 와라!"

새벽 4시 무렵 소의 울음을 실은 트럭이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며 우시장으로 하나둘 몰려옵니다. 몇 안 되는 소 장수들이 따뜻한 입김을 부딪히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걸쭉한 인사를 교환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시장이 서는 날을 가장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네 이웃 아저씨들인가 봅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이른 새벽 단순히 우시장에 구경하러 오는 아저씨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간 못 다한 애정 표현을 익살스런 '욕'으로 무심히 내뱉는 아저씨들의 표정이 능청맞습니다.


시끌벅적한 인사가 오고 가면 트럭에서 내리지 않으려는 소와 끌어내리려는 소 중개인간의 치열한 사투가 벌어집니다.

"으미 무시라, 뭔 넘의 성질이 저리 지랄인겨?"
"저 놈의 지랄소 비켜요, 비켜! 뒷발에 채이면 다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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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어미 소가 눈에 안 보여서인지, 아니면 처음 본 중개인이 낯설어서인지 어린 송아지가 처절하게 발버둥을 칩니다. 억지 부리는 소를 달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의 꼬리를 잡고 꼬아 비틀어 놓는 것이라 합니다. 한바탕 펄쩍 펄쩍 뛰며 소동을 벌였던 송아지가 꼬리를 비틀자 거짓말처럼 얌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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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장이 채 열리기도 전에 상인들은 이미 마음에 드는 소를 점찍어 놓고 중개인과 엎치락 뒷치락거리며 집요한 로비를 합니다. 자신의 신세를 아는지 소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새벽 공기를 흔들어 깨우면 본격적으로 여기 저기서 흥정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시작됩니다.

거래가 끝난 소는 무게를 단 뒤 도축장으로 끌려가거나 구매자에게 넘어갑니다. 소는 예로부터 농민들에게 목돈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이자, 정신적 지주, 인생의 마지막 저축 혹은 보험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통 소 한미리를 키우는데 드는 일 년 사육비는 대략 70만원 정도입니다. 요즘은 수소에 비해 암소가 높은 가격에 팔리는데, 어금니가 빠져버린 암소는 똑같은 무게의 암소여도 고기가 질기고 가격도 3배나 떨어진다고 합니다. 우시장엔 키우던 소를 팔아야 하는 소 주인의 씁쓸함과 좋은 소를 사게 된 상인들의 설렘이 교차되며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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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가업을 이어 부업으로 소 15마리를 키우고 있는 이용범(35)씨도 5년간 키운 암소를 팔러 나왔습니다. 정성스레 키웠던 그의 암소가 제 값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소 중개인의 수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네 농촌 현실이 그렇듯 농민들은 많은 유효한 정보로부터 소외됩니다. 때문에 그는 더욱 더 소 중개인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농민들을 장려하는 축협과 관의 배려에 그가 진한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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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아들 이용범씨와 같이 나온 김영옥(68)씨는 "과거 우시장의 흥겨움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합니다. 춘천에서 농사 지으며 30년을 넘게 살아온 그녀는 "옛날 우시장엔 감히 사람 발이 디딜 틈도 없었다" 며 그 당시 활기찬 시장 기운과 사람 냄새를 못 잊어 합니다. 덧붙여 지역 주민들의 원성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우시장의 미래에 대해 연방 씁쓸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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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사람들이 암소의 엉덩이를 까보며 이빨을 들춰봅니다. 엉덩이 살을 보며 영양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갈비뼈를 누르며 얼마나 지방이 붙어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의 소가 1킬로에 9200원으로 낙찰되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와 작별 인사를 합니다. 다행히도 소가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그가 원하는 비슷한 가격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소가 새로운 주인에게 다시 양육될지 아니면 도살장으로 끌려가게 될지 그건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소에게 남은 정을 단호하게 끊으려는 듯 그가 아무 말 없이 성급하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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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모든 소가 예의 그 순수한 눈을 깜박거리며 온순할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몇몇 소들은 분에 못 이겨 거친 콧김을 뽑아내며 생경한 고함을 질러대곤 합니다.

이용범씨가 말하는 성질 사나운 소와 온순한 소의 구분법은 얼굴의 넓이와 길이에 달려 있습니다. 대체로 얼굴이 긴 소가 성질이 거칠고 얼굴이 넓게 퍼진 소가 성질이 온순하다고 합니다. 덧붙여 김영옥 할머니는 큰 키에 늘씬한 몸, 넓적한 등과 누런 털을 건강한 소의 대략적인 특징으로 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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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한국인에게 '소'는 단순한 동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농민의 가장 큰 재산임과 동시에 가족이자 정직한 일꾼이었습니다. 최근 한우의 암소 시세는 1kg에 9200원 정도로 높은 시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높은 시세가 앞으로 어떻게 곤두박질칠지 모르기에 많은 농민들이 불안해하며 소를 빨리 내다 팔고 있다고 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모두가 여지없이 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지만 지금까지도 그리 달라진 건 없다고 합니다. 신토불이 우리 한우를 지키는 건 단지 농민들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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