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51

제세활빈단(制世活貧團) (4)

등록 2003.06.05 14:20수정 2003.06.0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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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본좌가 알아듣게 설명하도록!"
"조, 존명! 속하는…"

서슬 시퍼런 구부시의 명에 화들짝 놀란 오각수는 잽싸게 귓속말을 건넸다. 잠시 후 구부시는 앓던 이가 빠지기라도 한 듯 호호탕탕한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크하하하! 크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

그의 앙천광소는 길었다.

이날 구부시와 오각수는 질펀한 술자리를 나누었다. 상하가 분명한 무림천자성에서 엄연한 상전인 구부시와 그의 졸개인 오각수가 같은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둘은 마치 막역지우(莫逆之友)라도 된 듯 술잔을 돌리며 술을 마셨다. 뭔가 파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일은 전에도 한번 있었다. 구부시가 부친의 여러 아들들을 모두 따돌리고 무림천자성의 차기성주에 임명되었을 때였다.


그때 오각수 도날두의 암계가 없었다면 무림천자성의 현 성주는 멍청하기로 따지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구부시가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똑똑한 구고어(九暠馭)였을 것이다.

후계를 결정하려는 순간 오각수의 농간에 의하여 구고어 대신 구부시가 성주가 된 것이다.


이후 구고어는 권력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개 야인(野人)이 되어 버렸다. 그대로 있다가는 마음 좁은 구부시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보고 받은 구부시는 오각수 도날두를 불러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가 아니었다면 성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간특한 오각수의 두뇌에서 무언가가 또 나온 모양이다. 그리고 그 꾀가 몹시도 마음에 든 것이 분명하였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암계가 꾸며지고 있었다.

* * *

"어떻게 하겠소? 하실 마음이 있소?"
"하겠소이다."

이회옥의 머리는 힘차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호리호리한 체형을 지닌 청년이 앉아 있었다.

금빛 면구를 쓰고 있기에 용모를 알 수 없는 그는 제세활빈단(制世活貧團)이라는 단체의 단주라면서 금면일호(金面一號)라 불러달라 하였다.

그러고는 제세활빈단은 글자 그대로 세상을 다스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편케 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는 부연설명을 하였다.


처음 주청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에 의하여 불려나온 이회옥은 비룡과 노도를 풀어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신이야 기회를 보아 도주하면 그만이지만 무공을 모르는 조연희가 문제기기 때문이었다.

질풍이나 노도 중 한 마리라도 있다면 그녀를 태워 보낼 수 있지만 그럴 수 없기에 후회한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녀 때문에 꼼짝없이 정체불명인 장년인의 뒤를 따르게 된 이회옥은 대략 반 시진쯤 따라간 끝에 반쯤 허물어진 관제묘에 발을 들여놓았다.

오는 동안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불러냈으며, 왜 이곳까지 끌고 오느냐고 여러 번 물었지만 장년인은 아무런 대꾸도 않아 무척이나 답답했었다.

관제묘 안에는 높이가 무려 이 장에 달하는 나무로 깎아 만든 관운장의 상이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고색창연하였다.

그것 이외에는 제사를 지낼 때 쓸 제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황량하였는데 인적이 끊긴지 오래 되었는지 잡초의 흔적 수북할 뿐인 그런 곳이었다.

이회옥이 왜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왔는지를 물어보려 할 때였다. 장년인이 익숙한 손길로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의 아랫부분을 슬쩍 건드리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건만 놀랍게도 거대한 목상(木像)이 스르르 뒤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동시에 지하로 통하는 시커먼 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기관이라는 것인 모양이었다.

대략 이십여 발짝마다 하나씩 켜져 있는 횃불 역시 기관에 의하여 발화(發火)된 듯 싶었다. 덕분에 사물을 식별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호기심이 동한 이회옥은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그 결과 통로가 만들어진지 무척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딛고 다니는 바닥은 물론 양쪽 벽과 천장까지 본 바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바닥의 이끼는 마치 두터운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푹신푹신하였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두 치는 넘는 두께였다. 이 정도가 되려면 꽤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하겠기에 오래 되었단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통로를 따라 대략 십여 장에 달하는 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제법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금면일호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있었다.

커다란 원탁 둘레에 앉은 사람들의 수효는 정확히 다섯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회옥은 따뜻하면서도 정중하게 맞이하는 금면일호의 태도로 미루어 적어도 화(禍)는 없다는 판단할 수 있었기에 적이 마음을 놓았다.

오면서도 혹시 해코지를 하려는 것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하던 터였다. 자신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만 여인의 몸인 조연희가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무튼 안내하던 장년인을 비롯한 일행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었다. 이것은 적지 않은 내공을 지닌 고수들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무력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순순히 따라온 것이다.

이회옥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림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어야하였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장시간에 걸쳐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생각하여 잠자코 있었다. 그 결과 무림 역사의 대맥(大脈)을 짚어낼 수 있다.


무림의 근원은 오래 되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무림이라는 세계가 형성된 때는 소림사가 창건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시기에 차이는 있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많은 문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무림이 형성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일월마교를 비롯하여 화존궁, 월빙보, 구룡마문 등 마도 문파들의 원류가 되는 방파들 역시 형성되었다.

이후 무림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각축장으로 변모하였다.

누가 더 뛰어난 자질을 지닌 제자를 거두느냐와 얼마나 많이 모집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때 강자존(强者尊) 약자멸(弱者滅)이라는 대원칙이 생겨났다. 당시 정파 무림에서 발군의 실력을 지닌 곳으로 인정된 곳은 소림사를 비롯한 무당파 등 칠파일방이었다.

처음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상대가 누구이건 일단 붙어보았다. 누가 더 강한지는 붙어보지 않고는 모르기 때문이다.

덕분에 각파의 무공은 날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상대의 힘이 어느 정도 파악된 후에는 좀처럼 붙으려 하지 않았다.

종종 양패구상을 당해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무림에서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여기 저기에서 크고 작은 혈전이 벌어졌다. 난마처럼 얽히고 설킨 은원(恩怨)과 자파의 명예나 이익 때문이었다. 이것이 무림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한 원동력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일구월심 칼을 갈면서 점점 더 강한 무공이 창안되었고, 더 강한 병장기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문파든 골치 아픈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유서 깊고 명망 높은 소림사라 할지라도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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