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혹은 나의 이야기

전경린의 <열정의 습관>

등록 2003.06.09 02:02수정 2003.06.0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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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경린 <열정의 습관>

전경린 <열정의 습관>

Women in black : 미홍과 가현

<열정의 습관>의 주조색은 검정이다. 검정은 극적이며(그 둔한 색감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가장 현란한 색 중 하나이다. 검정은 섹시함과 단정함이라는 모순된 성질을 동시에 내포한다. 이 소설에서 검정의 대비를 보여주는 것은 미홍과 가현이다.


미홍의 검정은 화려하고 도발적이다. 미홍의 첫경험은 칠흑처럼 어두운 방에서 이루어졌고 미홍의 꿈에서 펄럭이는 검정색 스카프는 억압된 성욕의 표출이다. P를 만나러 가면서 검은색 일색으로 차려입은 미홍의 모습이나, 진성을 만나기 전 이유 모를 설레임을 느끼며 사들인 검은 빛깔의 화려한 속옷들, 검은 유리구슬 스탠드는 곧 미홍의 섹슈얼리티를 상징한다.

미홍의 검정은 화려함, 도발적임, 뜨거운 사랑과 성욕의 이미지를 담으면서 전체적으로는 순결을 의미하는 흰색과 대조되는 '탈순결'의 의미를 지닌다. 탈순결은 일찍이 미홍이 정한 '생애의 방향성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기도 했다.

반면 가현의 검정은 소박하고 단정할 뿐이다. 가현에게는 광택이 나거나 화려한 레이스나 구슬달린 속옷 대신 질기고 투박한 신발과 옷이 있을 뿐이다. 가현은 자신에 대해 "공허하고 단정한 모범성이 역겹고 관절이 아프도록 후회스럽다"고 토로한다.

두 아이를 수유한 덕분에 더욱 검어진 젖꼭지는 더 이상 성적 매력을 내뿜지 못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가현은 10년만에 만나기로 한 옛사랑과의 약속을 취소해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언젠가 길거리에서 보았던 여자처럼 자신도 검은 숄을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갈 것같은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다.

가현이 표현하는 검정의 이미지는 무채색의 황량함이다. 무성화된 존재, 여자도 남자도 아니라는 아줌마라는 제 3의 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검정이다. 그것은 생기가 없고 적막하며 공허하고 건조하고 미지근하다. 가현에게 검정은 '억압'의 의미인 것이다.


미홍의 검정이 아슬아슬하고 모험적이며 무례한 검정이라면 가현의 검정은 규범의 테두리를 넘지않으며 답답하고 정적인 검정이다. 미홍의 검정이 동적이며 스스로를 움직이는 주체적 검정(선택하는 검정)이라면 가현의 검정은 정적이며 상대에게 통제당하는 객체적 검정(선택당하는 검정)인 것이다.

그녀들의 첫사랑 : 가현과 인교

가현과 인교는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기까지 첫사랑을 만난다. 둘 다 스무살 남짓한 시절에 사랑했던 사람과 20여년이 지난 때에 재회하게 된 것이다. 가현과 인교 모두 그들의 첫사랑을 만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첫사랑 특유의 서툴고 애틋함 또한 공통 분모이다.


가현은 오래도록 첫사랑 S를 잊지못했다. 상상 속에서 S는 언제나 가현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현은 생각했다. 다시 S를 만나게 되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라고.
"빈손으로 집을 떠날 거라구요. 그때는 맨몸으로 내 존재의 의외성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온 세상의 의식과 대치할 용기를 낼 거예요. 물론, 물러서지 않지요."
그리고 10년만에 S가 전화했을 때 가현은 그 자세로 오래 기다려온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이와는 달리 인교는 그를 떠올려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20년동안 자신을 사랑해왔다고, 한순간도 잊지않았다고 말했을 때 인교는 눈물을 흘렸다.
"영혼의 오르가즘을 느낀거죠. 그랬어. 어느 순간에 그의 말이 진실이 되고마는 어떤 화학적 작용같은 거였어."

그러나 가현과 인교의 재회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가현은 S를 만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억제하고 억압했다. 그녀는 이미 스물네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가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감정을 정화시키면서 현실을 한없이 무화시키고, 약속을 유보시키며 긴장을 오래오래 끌고가는 일'밖에 없었다.

가현은 자신이 "검은색 레이스 슈미즈와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검정색 하이힐"을 가졌더라면 스스로 여성이기를 몹시 갈망했을테고 S와도 수없이 모텔을 드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현은 그의 말대로 "아무런 방법도 없이" 검은색 속옷과 하이힐을 동경하고 있을 뿐이다. 가현에게 첫사랑은 덧입혀진 억압같은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교의 첫사랑은 인교를 이제까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해방자 역할을 한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인교는 모든 일에 다음과 끝이 보여 삶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만난 후 인교의 삶은 다시 혼란스러워졌고 흘러가기 시작했다. 인교는 그의 말대로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 방황을 선택했고 마침내 그를 억압해온 적의와 광기를 극복해냈다.

이렇듯 가현과 인교의 만남이 그려낸 상이한 궤적은 그녀들의 행동양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가현과 인교는 첫사랑을 통해 현재 자신들의 모습을 더욱 명확하게 발견한다. 기꺼이 혼란스러움을 택한 인교와 달리 가현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S가 아무리 섹스를 요구해도 끝까지 버티고 예전처럼 독거노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렸다. 결국 인교의 첫사랑은 정현주라는 이름 석자를 획득하여 소설 속에서 구체화되었지만 가현의 첫사랑은 S라는 이니셜로 남아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숲속으로 나무와 사랑을 하기위해 사라지고 만다.

나에게 너의 스타디를 허락할 수 있니? : 인교와 미홍

"나에게 너의 스타디를 허락할 수 있니?"
갑작스러운 Y의 말이었다. 스타디가 뭐냐고 미홍이 반문하자 Y는 항문이라고 대답했고 왜 항문이 필요하냐고 다시 묻자 Y는 항문은 곧 영혼이라고 대답한다.

인교와 미홍은 애널섹스를 한다.
인교의 애널섹스는 가정교사 노릇을 하던 아이들의 삼촌 요구로 시작되었다. 스무살 인교는 모든 것이 부족해서 모든 것이 불안했다. 좁은 방에 누우면 곧장 울음이 터져나오는 그런 때였다. 그리고 삼촌을 만났고 그는 어느날 인교의 바지를 벗기고 뒤에서 넣었다. 인교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가 여러 가지 선물을 풀어놓았을 때도 사랑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촌이 인교를 돌려세우는 순간 인교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친절과 폭행, 부드러움과 광포함 사이를 왕복하는 극단의 혼란 속에서 인교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인교는 그런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어야했다.

끝내 집을 뛰쳐나온 후로 인교는 사랑과 적의를 혼돈하기 시작한다. 그 시절 인교를 채운 것은 심술궂고 공격적이고 사나운 망각과 허기였고 그 결과 상처를 주고받는 고통의 시간과, 쾌락도 느끼지 못하면서 섹스로 치닫는 자학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미홍은 두 번 애널섹스를 한다. 정확히 말하면 한번은 거절했고, 한번은 받아들였다. 미홍이 거절한 쪽은 무턱대고 영혼을 원한다며 항문에 삽입하길 원한 Y였고(그 역시 이니셜로만 남았다), 미홍이 받아들인 것은 언어, 영혼, 육체의 일치를 느낀 김진성이었다(김진성은 정현주와 함께 유일하게 생명력을 부여받은 남자다).

Y는 틀렸다. 영혼은 항문 따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영혼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다. 입안, 질, 페니스, 항문, 팔목 어느 곳에나.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마음이 이끌리는 방향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은 자신이 선택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선택하는 내 몸 어디에나, 내가 선택하는 상대의 몸 어디에나.

그녀들의 이야기, 혹은 나의 이야기

<열정의 습관>은 여름과 가을을 거치면서 세 여자가 겪은 변화들을 도발적이고 열정적이며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미홍은 영혼까지 일치한다고 생각되는 상대를 만났고 그와의 섹스를 통해 오르가즘까지 경험한다. 사랑과 적의를 혼동하며 공격적 태도로 일관했던 인교는 현주를 만남으로써 적의와는 다른 사랑, 광기와는 다른 섹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의 성기도 보지못하고 눈을 꼭 감은채 강간당하듯' 섹스를 하던 가현은 이제는 자신의 성에 눈을 뜨면서 섹스를 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조금은 과장되어 있으면서도 축소되었다. 또한 다소 비현실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다. 어떤 이에게는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다른 이에게는 축소되어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어떤 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분명히 비현실적인데 다른 이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일상이고 현실일 수 있다.

성에 있어서는 어떠한 과장이나 축소, 어떠한 비현실성이나 현실성도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그처럼 성에 대한 관념이나 이상, 성향이 다른데도 사람들은 한가지 혹은 두세가지의 성만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틀에 자신들을 끼워맞추려 한다. 불행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열정의 습관>은 그녀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들의 이야기며 나의 이야기다.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지지는 못할 테지만 일단 사랑의 상대를 만나게 되면 열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서슴없이, 내 생을 걸고 사랑을 줄 것이며 받을 것이다. 함부로 성욕을 발산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이에게는 아낌없이 표현하고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충족받을 것이며 그를 충족시켜줄 것이다. 금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는 우리가 꿈꿔온 모든 형태의 사랑과 섹스를 주고받을 것이다. "꿈의 훈련을 거듭하면 전지전능한 꿈을 경험할 수 있듯이 연애와 섹스의 훈련을 거듭하면 오르가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열정의 습관'들….

열정의 습관

전경린 지음,
자음과모음(이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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