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55

다물연공관 (2)

등록 2003.06.10 13:24수정 2003.06.1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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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광개토대제! 그 위대한 이름을 여기에서 또 보다니…"

글을 읽어내려 가던 이회옥은 옷깃을 여몄다. 그런 그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숙연해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금강암 유람을 갔다 오는 동안 읽었던 서책 가운데에는 선무곡의 역사가 기록된 사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엔 한때 선무곡을 지상 최강의 방파가 되게 하였던 광개토대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그것을 읽는 동안 이회옥은 얼굴이 상기되고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에 전율했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였던 대영웅의 업적은 너무도 위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이곳에서 다시 보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민 것이다. 왠지 불경(不敬)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아서이다.

"흐음! 을지가의 대가 끊기면 대 고구려의 기상을 지닌 후인이 출현한다고? 흐음! 을지가라… 들어본 적이 없는데, 혹시 대가 끊겨서 사라진 건가? 흐음! 뭐라고 했더라?"


선무분타의 순찰로 부임한 이후 분타주를 비롯한 정의수호대원들로부터 선무곡에서 제법 목소리깨나 낸다는 사람이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청죽수사를 비롯하여 금의존자가 있었고, 삼의와 일타홍 홍여진의 부친도 있었다. 선무곡의 주요인물이면서도 설명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곡주가 된 일흔서생 노현이었다.


설마 그가 곡주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당시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싶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질풍노도로부터 좋은 망아지를 얻어 그놈을 잘 조련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회옥은 을지가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너무도 건성으로 들었기에 제대로 된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한 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젠장! 그때 제대로 들을 걸…"

이회옥은 후회란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흐음! 일단 을지가의 대가 끊겼는지 여부를 확인해 봤으면 좋겠는데… 대가 끊겼다면 혹시 알아? 내가 그 후인일지?"

이회옥은 내심 광개토대제의 뒤를 이어 선무곡을 위대해지게 할 후인이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일단 을지가의 대가 끊겼는지 여부이다.

만일 대가 끊겼다면 인연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광개토대제가 선무곡주였던 때는 적어도 천 년 전의 일이다. 석탁에 글을 남긴 을지혁은 분명 동시대의 사람이다. 따라서 이곳 다물연공관과 제세활빈단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세활빈단이 이곳을 연공관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을지혁의 안배가 그만큼 절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누군가가 이곳에 안배된 것을 얻었다면 아마도 절세고수가 되어 천하에 그 명성이 찌렁찌렁 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선무곡 출신 중 이름을 날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을지혁의 안배는 아직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젠장! 나가봐야 알겠군. 헌데, 이걸 눌러서 상판이 바닥에 닿으면 입구가 열린다고? 그렇다면 오랜만에 힘 좀 써 볼까? 크크크! 힘쓰는 거라면 내가 한 힘하지. 아암! 청룡갑으로 얼마나 단련되었는데… 야아압! 내려가랏."

처음엔 쉽게 가라앉을 것이라는 생각에 별 힘을 주지 않고 눌렀다. 하지만 전혀 미동도 않는 듯하여 점차 힘을 늘려갔으나 석탁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쭈? 이것 봐라…? 좋아, 야아아아압! 끄으응!"

나중엔 전력을 다하여 눌렀으나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헉! 이거 혹시 고장난 거 아니야? 야아아압! 끄으응!"

거의 반 시진이 넘도록 석탁을 눌러도 보고 위에 올라가서 뛰어보기도 하였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야, 좀 내려가라! 내려가란 말이야. 젠장! 이거 진짜 고장난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나저나, 젠장! 힘을 좀 썼더니 배가 고픈데 어디 뭐 먹을 건 좀 없나?"

반 시진 가까이 석탁과 씨름을 하느라 지친 이회옥은 뱃속에서 연신 들리는 쪼르륵거리는 소리에 심한 허기를 느꼈다.

하여 가까이 있는 석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앙 광장에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먹을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휴우! 불행 중 다행이군."

석실에 줄지어 있는 단지마다 가득 담겨 있는 벽곡단을 발견한 이회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굶어죽을 위험은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천여 명이 최하 십 년 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분량이 있었던 것이다.

"흐음! 그냥 먹기엔 좀 뻑뻑할 것 같은데 어디 마실 물은 없나? 이렇게 준비해 놓은 것을 보면 어딘가에 준비되어 있을 텐데… 흐음! 어디에 있지? 우와! 이게 다 뭐야? 세상에… 어디에서 이 많은 것들을… 우와! 이, 이건…!"

마실 물을 찾아 다른 석실에 발을 들여놓았던 이회옥은 그 자리에 굳은 채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적어도 사방 십여 장은 족히 되는 거대한 석실에는 높이가 한 길을 훨씬 넘는 서가(書架)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공비급인 듯한 것들이 빽빽하게 꼽혀 있었다.

이회옥은 왕구명의 가전 무학이 기록된 청룡검급과 무림천자성 제일호법 조경지가 하사한 나한기공 주해를 본 것이 전부이다. 그나마 청룡검급은 검법인지라 제대로 살펴본 적도 없다.

그리고 나한기공 주해는 강호에 알려진 소문과 달리 익히기만 하면 치명적인 조문이 발생되는 나한기공에 대한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상은 일류라고는 할 수 없는 비급이었다.

소림사 제 십일대 장문 방장인 효월선사가 만든 그것은 나한기공을 기초로 만든 무공입문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내용 중에 극상승 무공과 버금갈 무리(武理)를 담고는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극히 지엽적인 것이기에 일류라 하기엔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만일 서가에 꼽혀 있는 것들이 정말 무공비급들이라면 이회옥에게 있어 이곳은 단순한 서실이 아니라 보물창고인 셈이다. 하여 갈증도 잊은 채 황급히 서가로 다가갔다.

"에이, 이게 뭐야? 효경(孝經)? 이건? 음! 이건 논어(論語)군. 이건? 흠! 이건 대학(大學)이잖아. 이건 중용(中庸)이고, 이건 시경(詩經). 이건 서경(書經), 이건 역경(易經), 흐음! 이건 예기(禮記), 춘추(春秋)… 젠장! 무공비급은 어디 있는 거야?"

서가에 빽빽하게 꼽혀 있는 책들이 모두 무공비급이라 생각하였던 이회옥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학문을 익히는 서생들이나 주로 봄직한 서책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투덜대며 이 책 저 책을 뽑아 보던 이회옥은 더 이상 책 뽑기를 포기하였다.

무공을 익히려던 그에게는 심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학문을 닦으려던 서생이라면 사정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장자(莊子)는 천하편(天下篇)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혜시다방(惠施多方) 오거지서(五車之書)!

장자의 친구 중에는 혜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박학다식은 그가 소장한 장서가 다섯 수레나 되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당나라 시인인 두보(杜甫)는 제백학사모옥시(題柏學士茅屋詩)를 지으면서 오거서(五車書)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사내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송팔대가 중 하나인 유종원(柳宗元)이 지은 육문통선생묘표(陸文通先生墓表)에는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는 구절이 있다.

수레에 실으면 소가 무거워 땀흘리고, 집에 쌓으면 대들보까지 닿을 정도로 많은 서책을 소장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서실에 있는 서책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백 수레는 너끈히 넘길 만큼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

만일 같은 제목인 서책이 없다면 일찍이 어떤 학문의 대가라 할지라도 읽어보지 못한 것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회옥이 무공보다 학문에 목말라하는 서생이었다면 아마도 탄식보다는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엔 학문보다는 무공에 목말라 하였기에 투덜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낙심천만한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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