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꺼지지 않는 그들의 새벽

[새벽을 여는 사람들 21] 동서울 우편 집중국 발착계 이학봉씨

등록 2003.06.15 10:35수정 2003.06.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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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새벽 1시. 동서울 우편 집중국의 발착계가 환한 빛을 발한다. 전국 각지에서 도착한 차가 끊임없이 우편물을 쏟아낸다. 발착계는 우편물의 도착과 발송을 담당하는 곳. 오늘도 전국 각지의 우편물이 주인을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오늘 밤 그들의 손길에 의해 내일 누군가 기뻐할 것이다.


강동구, 광진구, 광화문, 동대문구, 성동구, 송파구, 하남시의 우편물을 담당하는 동서울 우편 집중국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24시간 풀가동, 우편물을 분류하는 기계는 청소를 하기 위해 하루에 단 한번 멈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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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매달 10일부터 20일까지는 일명 '폭주기'라 불린다. 각종 고지서 발급이 많을 때라 우편물이 평소보다 3배 정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발착계 직원들의 손길도 바빠진다. 쉴새없이 드나드는 차에 우편물을 싣고 내리느라 정신이 없다.

발착계 이학봉(52) 주임은 우체국업무를 한 지 32년째다. 정념퇴임을 5년 앞둔 그는 이제 24시간 근무가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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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새벽 4시가 훨씬 넘은 시간. 먼 길을 가야 하는 우편물이 차에 실린다. 모두 제주도로 향할 것들이다. 6시까지 작업한 우편물은 아침 7시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은 우편물은 8시쯤 제주도에 도착해 9시까지 각 우체국으로 도착한다. 마지막으로 집배원의 손길을 거쳐 주인의 품에 안기기까지. 이제 우편물의 즐거운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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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내가 일이 힘들다고 생각했다면 30년 동안 못했을 거예요.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니까 지금까지 어려움 없이 지내온 것 같아요."

청주 집에서 출퇴근하며 24시간 근무하는 게 만만치 않은 일임에도 그는 별 문제 없다고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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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발착계는 몇 백kg이 넘는 우편물을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힘이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 20대이지만 한 차에 우편물을 싣고 내리기만 해도 얼굴에 벌써 땀이 송골 송골 맺힌다. 잠시 쉴 틈이 있기라도 하면 얼른 선풍기 앞으로 달려가 땀을 식힌다.


배기문(25)씨는 제대한 지 3일만에 시작한 이 일이 벌써 일년 반째다. 9월 복학을 앞두고 남은 세 학기 등록금은 충분히 모았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발착계는 언제 차가 들어오고 나갈지 몰라 쉬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차가 들어오지 않는 중간 중간이 커피와 담배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꼭 그럴 때만 다른 계 사람들이 보고 발착계는 할일이 없다 말한다고 그가 입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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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이메일로 안부를 주고받는 요즘. 우편업무량이 줄었겠다 싶었지만 오히려 증가했단다. 전에 없던 각종 고지서와 청구서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고지서랑 청구서가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은 넘어요. 요즘은 통신에 관한 고지서가 많아요. 인터넷 사용자도 많고, 휴대폰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리고 카드 고지서도 많아요. 예전에 우리가 하던 정감이 없죠. 왜 편지 하나 받으려고 매일 집배원 아저씨 기다리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난리 나요. 늦게 도착한다고. 당장 민원 들어오죠."

역시 30년 넘게 일해 온 김영수씨는 "정말 마음을 담은 편지는 30년 전에 비해 5분의1로 줄어든 것 같다"며 "그래도 군대로 오가는 편지의 양은 여전한 것 같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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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연말 연시는 연하장이다 뭐다 해서 정신없고, 2월 3월이면 무슨 데이라고 있잖아요. 초콜릿도 보내고 사탕도 보내는 거요. 추석 있죠. 또 추수 감사절이라고 있어요. 그리고 가을걷이 때 시골에서 부모들이 자식 준다고 온갖 곡물들을 보내요. 일년이 그렇게 지나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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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사람들은 우체국하면 집배원만 알지 우리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잘 몰라요. 보통 사람들이 알겠어요?"

점점 빠르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섭섭할 때도, 아쉬울 때도 있지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그는 안다. 단지 그는 편지 한 통이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주인을 찾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잊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어제 그랬듯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동서울 우편 집중국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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