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개가 익어가는 마을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87>풍개

등록 2003.06.19 13:34수정 2003.06.2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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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어가고 있는 풍개
잘 익어가고 있는 풍개이종찬
"으~ 턱쪼가리(턱)까지 찌리하다."
"그라이 그 시큼한 거로 말라꼬(왜) 따묵노?"
"아나! 니도 한 알 묵어봐라. 첨에는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시어도 자꾸 씹다보모 맛이 괘않타."


내 고향 마을 주변에는 50미터 남짓한 산들이 띄엄띄엄 황소처럼 엎드려 있었어. 그 산들은 멀찍이 보이는 불모산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그 가시나 젖꼭지처럼 볼록 솟은 시루바위를 유모로 삼아 젖을 빨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간혹 바람이 불 때면 마치 먹이를 받아먹는 제비새끼처럼 재재거렸고.

당시 내 고향집은 마을 한가운데 위치가 제법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어. 우리집앞에는 도랑이 흐르고 있었고, 도랑 앞으로는 다랑이논이 계단을 이루고 있는 산수골이 환하게 내려다 보였지. 내 고향집 바로 옆집은 큰집이었고, 그 큰집 앞에는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어.

산수골 곁에는 학교 운동장처럼 평평한 마당뫼가 있었지. 그 마당뫼 뒤 편에는 또 하나의 야트막한 산이 상남과 진해를 잇는 철로를 꼬리에 물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산을 앞산이라고 불렀어. 우리집 서쪽에 붙은 앞산가새가 아닌, 앞산 말이야. 왜 그렇게 구분해서 불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앞산과 앞산가새는 분명 그 쓰임새가 달랐다는 것만은 알 수 있어. 앞산가새는 산꼭대기 뒤 편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거의 없었지. 산 전체가 모두 다랑이 밭이었어. 하지만 앞산은 소나무와 물푸레나무 등이 빼곡히 들어차, 말 그대로 산이었어. 다랑이밭도 산 발꿈치 근처에 서너 개 널부러져 있었고.

앞산은 산 너머에 있는 가음정이라는 마을과 우리 마을을 경계로 동과 서로 길게 드러누워 있었어. 동쪽으로는 불곡사가 있는 비음산 자락과 철로를 경계로 떨어져 있었고, 서쪽으로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진 과수원과 공동묘지를 사이에 두고 앞산가새와 맞붙어 있었지.


"올(오늘) 너거 아부지 과수원에 나가셨나?"
"울 아부지 올은 상남장에 가시고 안 계신다. 근데 와?"
"그라모 너거집 과수원에 가서 땅에 떨어진 풍개 몇 개만 주워 묵자. 떨어진 풍개로 가만히 놔두모 뭐할끼고."
"그라모 퍼뜩 가자. 울 아부지 오시기 전에."

그 앞산에는 서너 마지기 될까 말까한 오가네 과수원이 하나 있었어. 그 과수원에는 포도나무와 복숭아나무 그리고 자두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우리 마을에서 대지주에 속하던 그 오가네에는 내 또래에 해당되는 동무가 한 명 있었어. 마을 어르신들이 과수원집 아들이라고 부르는.


그날, 우리들은 과수원집 아들을 앞장 세워 앞산에 있는 그 과수원으로 향했어. 과수원 입구에는 당연히 과수원집 아들이 망을 섰고, 우리들은 과수원으로 들어가 가지가 부러질 것을 퍽이나 조심하면서 푸릇푸릇한 풍개를 주머니 가득 따 넣었지. 풍개? 그래. 우리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두를 풍개라고 불렀거든.

근데 그 풍개는 너무나 시었어. 떫은 맛까지 감돌았지. 푸릇푸릇한 그 풍개를 한입 베어물면 이내 양 턱이 알싸해지면서 입에 침이 절로 가득 고였어. 우리들은 만 가지 인상을 다 찌푸리면서도 그 시큼한 풍개를 먹기에 바빴어. 그러다보면 어느새 입안 가득 향긋한 풍개향이 감돌았지. 제법 달착지근한 맛도 났고.

푸릇푸릇한 풍개
푸릇푸릇한 풍개의성군
"너거들 땅에 떨어진 거로 줍는다 카더마는 아예 따뿟네? 인자 내는 울 아부지한테 맞아 죽어뿟다. 우짤끼고?"
"너거 아부지가 봐도 잘 모를끼다. 귀신도 모르게 풍개로 솎아냈다 아이가. 그라고 가만히 놔둬도 어차피 지질로(저절로) 떨어질 풍개 아이가."
"그래도."

그랬어. 우리들은 과수원집 아들과의 약속을 스스럼 없이 어겼어. 그리고 아무도 땅에 떨어진 누르스럼한 풍개는 줍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 풍개는 이미 병이 들어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어. 게다가 실제로 주워보면 풍개의 반쪽 이상이 썩어 손으로 슬쩍 누르면 풍개 썪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

그날 저녁, 과수원집 아들은 아버지에게 혼쭐이 났어. 훤한 대낮에 쥐가 와서 풍개를 물고 갔느냐고 하면서. 우리들은 과수원집 아들한테 참으로 미안했어. 하지만 아무도 내가 그랬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지. 과수원집 아들도 종아리에 멍이 시퍼렇게 들 때까지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그때 우리들은 어른들의 눈썰미는 속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 그때부터 그 시큼하면서도 맛있는 풍개를 먹을 수가 없게 되었어. 하지만 마음씨가 착했던 그 과수원집 아들은 제법 노랗게 익어가는 풍개 몇 개를 아이들 몰래 내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어 주기도 했지.

과수원집 아들과 나는 평소에도 제법 잘 친했거든. 게다가 어머니와 오가네가 제법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빨갛게 잘 익은 풍개는 한번도 먹어볼 기회가 없었어. 과수원에서 풍개가 발갛게 익어가기 시작하면 과수원집 아재가 밤을 낮으로 삼아 과수원을 지켰거든.

"아나!"
"이기 뭐꼬? 풍개 아이가. 이렇게 잘 익은 풍개가 오데서 났더노?"
"울 옴마가 오가네 과수원에 가서 풍개 따주고 하루 품삯으로 받아 온 기라 카더라. 퍼뜩 무라. 누가 볼라."
"니 볼떼기(볼)처럼 너무도 곱게 잘 익어서 그냥 묵기는 좀 아깝다."
"문디 머스마! 씰데없는 소리 고마 하고 퍼뜩 무라. 내는 내가 주는 거로 니가 맛나게 묵는 모습을 보는 기 차암 좋다."
"???"

그래.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 푸릇푸릇한 풍개를 따먹던 기억이.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도 훨씬 더 되었구나. 그래. 삼십여 년 전의 그 과수원에서는 오늘도 그 푸릇푸릇한 풍개가 발갛게 익어가고 있을까. 삼십여 년 전 그 가시나는 오늘도 볼처럼 발갛게 잘 익은 그 풍개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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