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가 출가해 맺힌 한을 풀지 못했으니

항일유적답사기(43) - 석주 이상룡 (Ⅱ)

등록 2003.06.24 10:00수정 2003.06.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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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의 한

상해에서 돌아온 이상룡은 충격이 컸다. 임정 내분을 수습하지 못한 자탄과 적전 분열을 보인 독립지도자에 대한 염려, 날로 뻗어나는 일제의 세력, 그 세력에 투항하는 옛 동지들, 중국대륙 일대에 득실거리는 밀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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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와 자식을 왜놈의 종이 되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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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의 군자정 ⓒ 박도

이런 시국에 대한 우국 충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 때가 선생의 춘추 68세로, 당신은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일은 삼간 채 아들과 손자로 하여금 대신 그 일선에 나서게 하였다.

그 무렵, 아들 준형은 한중 유대 강화와 대일 공동 투쟁을 위하여 중국공산당 길림성 반석현의 책임자로, 손자 병화는 재만 한인 청년동맹과 농민동맹 사무집행위원 겸 반석현 모범학교 교사로 활약했다.

얼마 뒤, 중국 관헌이 조선인들의 결사에 의심을 가져 검거가 잇따르자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상룡은 반석의 호란하에서 세린하로, 다시 1929년에는 서란현 소과전자로 이주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본 관동군이 군사를 출병하여 봉천(지금의 심양)과 장춘을 잇따라 함락시키고 마침내 길림까지 함락시키자 독립 지사들 일부는 체포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소식을 듣고 이상룡은 이를 분개하여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깊은 병을 얻었다.

중국 마적 떼들이 일본 관동군에게 쫓기면서 민폐가 심했다. 허은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무렵 마적 떼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어느 날 우리 집에도 한 떼의 중국 마적이 몰려 와 내 목에다 총을 들이대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목숨이 위태한 순간, 아버님께서 나를 끌어안고 “죽어도 같이 죽지 너만 죽일 수 없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마적의 총구를 가로막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허리춤에 감춰 놓았던 은 닷 냥을 다 꺼내놓았다. 그러자 나는 풀어주고 아버님을 쓰러뜨리고 몽둥이로 내리쳤다. 사람 목숨이 순간에 달렸는데 사람 있고 돈 있지, 나는 당나귀 똥을 쳐낸 옆에다 묻어 두었던 길림 관표(당시 임시 화폐)를 다 갖다 주었다.

부피가 양철통 반만 한데도 그놈들은 그래도 양이 안 찼던지 집안을 모조리 다 뒤지고는 돈이 더 안 나오자 그제야 아버님을 풀어주고 돌아갔다.

그 일을 겪은 얼마 후 겨울, 추위를 막고자 토담집 벽에다 흙을 한 벌 더 바르고 있는데 마적단 수백 명이 다시 마을을 덮쳤다.

그들은 집집마다 들어가 조금 남아 있는 쌀마저 다 빼앗고는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마침 사다리 위에서 흙을 바르던 남편을 끌어내려서는 목을 천장 대들보에 매달았다.

마적단 두목인 듯한 자가 “너희 조선 놈들이 왜 일본을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뺏기게 하였느냐? 우리도 너희를 죽이겠다”고 했다. 그때는 수중에 한 푼의 돈도 없었다. 대들보에 목이 매달린 남편은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때 마침 당숙 광민씨와 길림 중국학교 동창생으로 이웃에 살고 있었던 금테 두른 군인이 뛰어 와서 “이 집 사람들은 살려 주라”고 말렸다. 그래도 그놈들은 막무가내로 “조선놈들은 다 죽여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변명할 틈도 주지 않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때, 뒤에서 다른 한 금테 두른 이가 쫓아 나와서 말렸다.

“이 집은 그렇게 하지 말라. 조선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이니 우리가 해칠 수는 없다”고 했다. 그제야 마적 떼는 슬그머니 남편을 풀어줘서 위기를 모면했다.

-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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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군자정과 연못, "영웅 장부가 해골을 아끼랴. 태평성대 훗날 돌아와 머무리." 군자정 주인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후손은 이 집을 관리할 여력이 없어서 국가에 헌납 추진 중이다. ⓒ 박도

이상룡은 병상에서 이런 가족의 수난을 보고, 며칠 후 오상현에서 여준 선생과, 신흥무관학교 초등군사반 교장이었으며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을 역임한 오랜 동지 이장녕이 마적떼들에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만 곡기를 끊고 냉수만 드시다가 끝내 숙환을 얻었다.

이상룡의 병환 소식을 듣고 안동에서 아우 이상동이 만리 길을 찾아왔다. 이상동은 3.1 운동 당시 안동에서 처음으로 만세 시위를 일으켜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실한 기독교 교인으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분이다.

하얼빈에 살던 막내아우 이봉의도 왔다. 이 분은 일찍이 을미의병에 참여한 바 있었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철혈 광복단으로 유격활동을 하였던 분이다.

형제분이 상면하자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아우가 “형님, 이제 그만 고국으로 돌아갑시다. 이렇게 고생하시다니…”하자, 이상룡은 “인생은 다할 때가 있거늘 무슨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만주 땅에다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나만 들어갈 수 없다. 장부가 나라를 찾겠다고 출가해서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선조의 혼령에 사죄하겠느냐? 나는 만주 땅에 씨나 떨어뜨리고 갈 테니,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이나 들어가게 하겠다”라고 말씀하면서 형제간 이승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가 임종할 때 임시정부 국민대표 이진산이 “선생님, 광복사업은 누구에게 맡기시고 가십니까? 통화현, 환인현, 영길현 높은 재를 넘으실 때, 기력이 강건하셔서 독립사업 성공하는 걸 보실 줄 믿었습니다. 나라 일이 암담하니 한 말씀 주십시오”하자, 이상룡은 한 말씀 남겼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 외람 되게 여러 동지들의 추천으로 중책을 맡아 조그마한 공로도 없이 죽을병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 같아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원컨대 여러 동지들은 외세 때문에 스스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힘써서 이 늙은이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게나. 우리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실 뿐이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어떤 목적이라도 달성하지 못함을 근심하겠는가?”

아들 준형에게 유언을 남긴 바,

“내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 효도로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평시에 중국 복장을 한 것은 중국에 동정을 얻기 위해 입은 것이지 좋아서 입은 것은 아니었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되니,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때를 기다리도록 하라. 조국이 광복되거든 내 유해를 유지에나마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라.”

이상룡이 돌아가자 원근 각처에서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가족들은 이 참에 이상룡 유해를 모시고 환국을 서둘렀다. 동네의 조선족까지 따라 나서서 그해 5월 18일, 70여 명이 귀국 길을 올랐다. 이상룡의 유해를 담은 관은 마차에 실었다.

귀국 길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는 20여 년 전, 조국을 등지고 야반 도주해 올 때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긴 행렬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앞길에 사람을 내세워 망을 보게 한 후, 그들이 돌아와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면 5리나 10리씩 이동했다.

하지만 곧 마적 떼에게 붙들렸다. 마적 떼들은 인정사정 없이 일행의 소지품을 다 뒤져 돈과 귀중품은 다 빼앗고는 다시 마차에 실린 관을 뜯으려 했다. 하지만 관을 뜯게 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돈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손부 허은 여사는 하는 수 없어 헌 버들고리짝 속에 시집올 때 해 온 빨간 저고리, 남치마가 있어서 그걸 주자 그놈들은 옷감을 갈가리 찢어서 장총 끝에 매달아 흔들며 흥분해 길길이 날뛰었다.

그들은 붉은 것은 다 쪽쪽 찢어 총 끝에 매달고 시가지를 벌떼같이 누볐다. 70여 명의 식구를 하나하나 돈이 될만한 것을 죄다 털고 가던 길을 막고는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소과전자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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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묘역에 안장된 이상룡 초대 국무령 ⓒ 박도

이상룡의 유해는 유언대로 가매장했던 소과전자 뒷산에다 다시 모셨다. 허은 여사는 ‘어른의 혼령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고 여겼다.

보름 후, 가족은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환국했고, 이상룡의 유해는 그곳에 남겨졌다가 여섯 해가 지난 다음에 조카 광민이 취원장으로 이장했다.

1990년, 석주 선생 서거 58년만에 국가보훈처의 해외선열 유해 봉환 사업에 따라 국립묘지 임정 묘역에 편히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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