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와 자율활동의 차이
구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의 공산세계는 억압과 통제 사회였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한창 활동이 왕성하던 7, 80년대에는 공산세계가 세계적인 운동경기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코마네치 선수는 인간이 최초로 체조에서 만점을 획득했을 만큼 공산제국은 스포츠 강국이었다. 이렇게 스포츠 강국이 되기까지는 공산주의 특유의 사회구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올림픽을 순순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진짜 운동 선수만을 출전시키려고 노력을 했지만, 공산권에서는 이런 아마추어라는 개념조차 있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이념이었기 때문에 거의 기계나 다름없이 어려서부터 완전히 한 가지에만 매달리게 하고 그 외의 다른 활동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도록 국가에서 관리를 해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는 국가의 부속품이나 마찬가지이고, 오직 올림픽이라는 국제적 무대에서 입상하는 것만이 그 사람의 장래를 결정짓는 잣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인기 부분이 격투기(권투, 태권도, 유도, 레슬링 등)에서는 물론, 수영, 체조, 육상 등의 개인 종목에서는 국가의 지원을 받은 공산권의 선수들이 민주주의 나라들에 비하여 월등한 성적을 거두곤 하였다.
이는 민주주의 나라들의 선수들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선수들임에 비하여, 공산권의 선수들은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에 관리하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철저한 통제와 훈련을 통하여 만들어진 기계부속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억압하고 통제하에 하는 일은 당장 성과를 내어야 할 생산시설 등에서는 일시적이나마 생산성을 더 올릴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함께 할 사원들이 창의성이나, 자발성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어서 결국은 통제 사라지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육도 6,70년대까지 입시 위주, 암기 위주의 교육을 해왔었고, 학생들을 탄압에 가까운 고된 학습의 시간으로 이끌어 갈 수밖에는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난 올해로 교직생활 40년을 맞게 되었는데, 발령을 받은 지 4년째인 67학년도의 6학년 담임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늘 젊은 선생님들에게 억압하고 강제적으로 하는 학습의 역효과에 대해서 말리고, 주의할 것을 일러준다.
이것은 결코 나의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이자, 입시위주 교육이 헛된 망상이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여기에 적는다.
1967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이라고 시골 면 소재지도 아닌 리 소재지 12학급 규모의 학교에서는 조촐한 위로 잔치를 하였다. 겨우 학교 기성회장(지금의 운영위원장)이 자기 집에서 기르던 닭 두 마리 잡아서 닭죽을 쑤고 소주 몇 병을 준비한 잔치였다.
이 행사가 끝나고 이날 밤부터 6학년 담임인 나는 학생들과 함께 교실에서 합숙을 시작하였다. 오후 7시쯤까지 일찍 저녁을 먹고, 교실에서 잠을 잘 간단한 이불이나 담요를 챙겨 가지고, 오기로 하였다.
이 무렵까지만 하여도 농어촌에는 전기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던 관계로 각자가 자기 책상을 밝힐 호롱불을 준비하여 와서 저녁 공부를 7시 30분부터 시작하여 11시 30분까지 교과서를 외우고 시험문제를 풀고, 수련장을 푸는 일을 계속하였다. 11시 30분에 잠자리에 들면 공부하던 책상을 모두 뒤로 미루고 맨 교실 바닥에서 담요나 홑이불 한 조각을 덮고 잠이 들었다.
새벽 5시 잠자는 아이들의 깨워서 운동장을 두세 바퀴 돌린 다음에 씻고, 아침 공부를 시작하여 1시간 반 가량하고 나서 집으로 보내서,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면, 9시 30분부터 오전 수업을 시작하여 오후 6시까지 수업을 하고 다시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학교로 와서 밤새워 가면서 외우고 또 외우는 공부를 계속 하였다. 이렇게 정확히 5개월 15일(165일)을 하고 11월 30일 지루한 전쟁은 끝이 났고, 12월 3일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아주 좋은 결과를 얻었었다.
10여 개교의 어린이가 모여든 군청 소재지의 남자중학에서 2등, 4등, 여자중학에서는 1등, 3등을 하였고, 면내 사립중학에서는 1,2,3,5등을 불우한 학생들이 모이는 고등공민학교(중학학력 인정도 안되고 검정시험을 봐야하는 각종 학교)에서는 4개교의 학생들이 모였지만 1등에서 7등까지를 휩쓰는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나는 아주 자랑스럽고 퍽 보람있는 일인 양 의기양양하였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른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이미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아이들이 잘못 되어 가는 것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6학년 시절 그렇게 붙잡아 앉혀 놓고 억지로 시킨 공부가 지겹고 힘들어서 공부에 진력이 나버린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가서 이렇게 억지로 시키는 사람도 없거니와 여러 가지로 다른 환경을 접하면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남자들은 전원이 전기 시험인 1차에서 낙방을 하였고, 후기 시험에서도 보결로 입학을 하는 등 아주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었다. 이미 교직생활 10년이 넘은 시점에서야 겨우 억지로 공부를 시킨 아이들이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 이유를 깨닫고 억지로 가르치기 위해, 또는 하기 싫은 것을 억압으로라도 가르치려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며,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 이 졸업생들이 올해로 51세를 맞는다. 그 제자들이 모여 앉으면 그 때 엄청나게 힘들게 공부하였고, 매도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어려서 그런 고된 공부를 하다가 시키는 사람이 없는 중학교에 진학해서 너무 해방감에 젖어 제멋대로 하다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한탄들을 한다.
그래서 나는 젊은 선생님들께 부탁을 한다. 억지로 시키는 공부는 오래가지도 못하고 실패하기 쉽다. 진정으로 어린이를 사랑한다면 어떻게든지 스스로 하고 싶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학습의 왕도이고, 어린이들에게 영원히 후회하지 않게 만드는 길이니 그렇게 이끌어 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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