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 머금은 나무꽃을 보다 - 내소사

등록 2003.07.05 11:28수정 2003.07.1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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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는 맑았는데, 정읍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다.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먼저 내소사로 향한다. 시골의 시내버스에는 자신의 몸에 곱절은 되는 짐을 진 할아버지부터 피아노 곡 집을 끌어안은 여학생 그리고 우리 같은 답사 객으로 붐빈다.

감자밭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하얀꽃이 드문드문 피어있다. 저건 캐 보나마나 하얀 감자다. 권태응 시인이 <감자 꽃>이라는 시에서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라고 했으니까. 감자밭이 끝나니 소금밭이 보인다. 비가와서 그런지 적막하기 이를데 없다.


물기 머금은 나무꽃을 보다

선덕여왕 2년(633) 혜구(惠丘)라는 승려에 의해 창건된 내소사는 조선시대까지 내소사(來蘇寺)의 옛 이름인 소래사(蘇來寺)라 불리었다. 고려시대 문신이였던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는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전한다.

옛길은 적막하고 소나무 뿌리 엉켰는데
하늘이 가까워 북두칠성 잡힐 것만 같네
구름 따라 물 따라 나그네 절에 왔건만
붉은 잎 푸른 이끼 속에 스님은 문을 닫았도다

가을 바람 잔잔히 일어 저문 해를 불고 가니
산월(山月)은 창백하고 원숭이 울음 푸르도다
기이해라 삽사리 눈썹의 노스님
세상 일 모두 잊고 앉아만 있구나

또 조선후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소래사의 창건에 관한 내용과 함께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별도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잿더미로 변하여 현재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인조 11년(1633) 청민(靑旻) 비구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비 오는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은 신발에 누우런 진흙을 척척 붙여 준다. 땅이 내 몸을 끌어당기는 그 느낌이 좋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땅에서 끌어당기는 진흙과의 만남. 그리고 양쪽으로 줄지어선 전나무 숲. 그 중심에 내가 있다. 내가 아주 작아져서 점으로도 보일 것 같지 않지만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당한 나는 솔개가 병아리를 노리고 빙빙 도는 것을 올려다보듯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전나무의 끝은 보이지 않고 어지럽다.


일주문에서부터 계속되던 전나무 숲길은 절 집 앞마당에 이르는 양 갈래 길로 이어진다. 하나는 곧바로 천왕문으로 통하는 단풍나무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요사채 뒤쪽으로 돌아가는 벚나무 길이다. 삶의 양갈래 길에서 좀 더 쉽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길을 사람들은 선택한다. 우리도 낮은 기와 담을 양쪽으로 데리고 대장처럼 서있는 천왕문으로 들어선다.

자연석을 쌓아 만든 낮은 기와담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입로에는 올려다보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버릴 것만큼 큰 당산 나무가 비를 맞고 서서 절집을 호위한다. 계속해서 보종루(寶鍾樓)와 범종각(梵鐘閣) 그리고 봉래루(蓬萊樓)가 있다. 맨 위에는 요사채인 설선당(說禪堂)과 무설당(無說堂)이 위치하고 이어 연꽃무늬 꽃문살을 가진 대웅보전이 팔작지붕의 날개를 활짝 펴고 우리를 내려다본다.


문(門)은 바깥과 안의 경계인 동시에 둘을 잇는 하나의 길(道)이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문에는 미륵세계와 속세를 이어주기 위한 꽃들이 한창이다. 꽃 문양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채색은 햇살에 바랫으나 나뭇결 나무무늬 그대로 간직한 문살은 고색창연한 꽃송이를 안고 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비를 피해 달려들지만 꽃무늬나무 문살은 빗물을 그대로 머금는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비를 구경하며 내소사 대웅전 건립설화를 생각한다.

내소사에서는 동참자를 모집하고 시주를 모아 큰 법당을 짓기로 했다. 그러나 대웅전 재건을 맡은 목수는 주춧돌을 세우고 건물을 짓는 대신 묵묵히 나무만 다듬었다. 사람들은 애를 태우며 기다렸다. 그때 장난기가 발동한 사미승 하나가 나무토막 한 개를 감추어 버렸다. 사미승의 소행임을 알게 된 목수는 부정탄 재목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해 그 나무토막을 빼고 법당을 완성하였다. 그 결과 오른쪽 앞 천장만 나무 한 개가 부족하다고.

또 하나, 법당이 세워진 후 전각에 단청(丹靑)을 하고 벽화를 그릴 적임자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나타나서 자신이 벽화를 그릴 터이니 벽화를 그리는 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러 날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이 절의 상좌가 참지 못하고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한 마리 파랑새가 붓을 물고 날아 다니면서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상좌가 엿보는 것을 알아챈 파랑새는 단청을 끝내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전 동쪽 도리는 바닥만 채색되고 덧그림이 빠져 있다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목수는 호랑이가 현화(現化)한 대호선사(大虎禪師)이고 벽화를 그린 파랑새는 관세음보살의 현화라고 한다.

약속, 그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설화다. 더불어 기다림도. 우리에게 전해지는 건립설화들을 보면 잠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함이, 기다림을 참지 못함이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경우가 종종있어 안타깝다. 반면,이런 설화가 있어 우리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하니 사람이란 참 오묘한 존재이다.

비는 서서히 그쳐간다. 파아란 능선은 제 몸뚱이에 열을 못 견뎌 하얗게 토해낸다. 소지단청은 빗물을 그대로 빨아들이고 있다. 나는 빗소리, 바람소리에 섞이는 풍경소리, 목탁소리를 듣는다. 두 눈을 슬며시 내려 감고 듣는다. 가만히 있으면, 요사채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도 들린다. 이젠 일어설 때가 되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다시 봉래루를 지나 천왕문을 나선다. 단풍나무 길 옆에 있는 부도전으로 오른다. 실개천의 돌다리를 건너 탄허스님의 글씨로 새겨진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를 만나 보고 내려온다. 비탈 밭 같이 비스듬한 곳에 배롱나무 두 그루가 지키고 있다.

빗발이 굵어지고 있다. 대뜸 이런 생각이 든다. 싸릿가지로 맨 울타리에 올려 키운 오이를 따서 엄마 치마폭에 쓱쓱 문질러 껍질 째 먹는 오이 맛. 그 오이 같이 자연스러운 내소사. 귤이나 사과처럼 달콤새콤하지 않고 배처럼 물이 많지도 않고 꼭 오이 정도의 신선한 맛을, 오이정도의 물기를 간직한 내소사.

내소사를 나와 산채비빔밥을 먹는다. 우리는 개암사로 가고 싶지만 식당아저씨가 개암사는 시내버스가 들어가지 않는단다. 걸어서 가면 약 한시간. 비 오는 흙 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서 호젓한 절 집에 놀러 가는 멋도 누려보고 싶지만, 내일 선운사 답사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서울에서 혼자 내려 온 이가 채석강에서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래서 개암사는 남겨두고 격포로 간다.

격포는 채석강에서 걸을 때보다 변산반도를 끼고 돌며 내려다보는 것이 더 좋다. 눅눅한 서해 바다에 내려앉는 검붉은 노을이 좋다. 버스 안에서는 '아~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 가봐'가 쌍쌍파티버젼으로 흘러나온다. 일몰을 배경으로 뻘 속에서 꿈틀대고 있을 게를 생각한다. 이제 서서히 해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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