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기 따러 갔다가 청둥오리 알을 건지다

등록 2003.07.07 11:00수정 2003.07.0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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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아주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잡초 뽑기로 한여름을 속절없이 보낸다더니, 백 평도 채 안 되는 밭이지만 장마철 잡초는 정말로 못 말립니다. 뽑고 나서 뒤돌아서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잡초 뽑기에,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들을 모 출판사에서 책으로 엮어 보자 하여 그걸 정리했고, 또 거기다 밥벌이 방송 원고 쓰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허리 골병들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모처럼 만에 산에 올랐습니다. 우리 집은 산을 등지고 있어 뒤로 누우면 산이 베개처럼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오르던 산을 열흘만에 올랐습니다.

a 소나무 가지위에 캠코더를 설치하고 거의 정신나간 수준으로 내 모습을 담아보았습니다.

소나무 가지위에 캠코더를 설치하고 거의 정신나간 수준으로 내 모습을 담아보았습니다. ⓒ 송성영

산딸기를 따기 위해 물병과 크고 작은 플라스틱 양동이 두 개를 배낭에 쑤셔 넣었습니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비껴 걸어 메 총’식으로 캠코더 가방을 비껴 멨습니다. (지난봄부터 산에서 얻어먹고 있는 먹을거리들을 캠코더에 담아 오고 있습니다.)

산은 장맛비로 축축이 젖어 있었습니다. 어느새 산길은 무릎까지 올라온 잡풀들과 칡넝쿨로 우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화를 신고 있어서 큰 불편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장화는 새로 산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 산 것이 아니라 난생 처음 산 것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꼭 한번 사 신고 싶었던 장화였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병아리들처럼 노란 장화를 신고 비 내리는 마당에서 철퍼덕거릴 때마다 어린 기억 속을 더듬곤 했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을 통해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꼭 사 신겠다고 다져먹고 있다가 열흘 전쯤에 미리 사 놓았던 장화였습니다. 기억 속의 흰 장화는 아니었지만 나도 이제 내 발에 꼭 맞는 새 장화를 신었습니다. 매끈매끈한 만원짜리 푸른색 장화였습니다.

예전에는 비가 온 뒤끝에 산에 오르게 되면 다 낡은 등산용 운동화에 빗물이 스며 들어와 늘 발바닥이 찝찝했고, 바지가 무릎까지 흠뻑 젖곤 했는데 이번에는 끄떡없었습니다. 빗물에 젖어있는 길 없는 길, 풀숲을 당당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풀숲에서 똬리 틀고 있을지도 모르는 독사 걱정도 붙들어 맬 수 있었습니다.


a 짝짓기 하고 있는 풍뎅이를 만났습니다.

짝짓기 하고 있는 풍뎅이를 만났습니다. ⓒ 송성영

a 작년에 미쳐 발견못한 다 썩은 영지버섯에서 새 싹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미쳐 발견못한 다 썩은 영지버섯에서 새 싹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 송성영

터벅터벅 산길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워 콧노래조차 흘러 나왔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뭐 이런 싱거운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누군가 내 모습을 보았다면 ‘뭐 저런 정신나간 놈이 다 있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나는 문득 기분 좋은 내 모습을 보고 싶어 소나무 가지 위에 캠코더를 올려놓고 사진까지 찍었으니까요.

내 기분이 정신나간 수준으로 좋았던 것은 딱히 장화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허리 굳어지는 것도 까마득히 잊은 채 컴퓨터에 눈을 박고 있다가 허리를 펼 수 있는 무한한 여유가 생겼다는 것, 밥벌이를 마무리지었다는 홀가분함, 얼마 있으면 책이 나올 것이고 적어도 서너 달 정도의 생활비를 확보해 놓았다 라는 뿌듯함 등등 이런 복합적인 것들이 나를 기분 좋게 했던 것 같습니다.

a 청솔모는 아직 채 익지도 않은 잣을 죄다 먹어 치우는 잣 도독놈이랍니다. 조만간 호두도 싹쓸이해갈 것입니다.

청솔모는 아직 채 익지도 않은 잣을 죄다 먹어 치우는 잣 도독놈이랍니다. 조만간 호두도 싹쓸이해갈 것입니다. ⓒ 송성영

헌데 작년에 점찍어 놓았던 산딸기 밭은 온통 풀숲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작년에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와 함께 왔었을 때,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던 바로 그곳이 분명 했습니다. 그때는 산딸기를 담아낼 수 있은 것이 고작 작은 비닐 봉지가 전부였고 또한 예고 없이 언제 어떻게 대가리를 쳐들고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를 뱀에 대해 전혀 무방비로 왔었기에 반에 반도 못 따고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었습니다.

그 풀숲이 분명했는데, 산딸기가 쉽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가시 덩굴을 헤치고 다니며 자세히 살펴보니 산딸기는 이미 거의 다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기를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a 산딸기가 벌써 다 지고 몇 개 안 남았답니다.

산딸기가 벌써 다 지고 몇 개 안 남았답니다. ⓒ 송성영

올해는 아이들도 없이 홀가분하게 혼자 왔고, 턱하니 장화까지 자랑스럽게 장만해 신고 또 배낭 가득 산딸기를 따 담을 양동이까지 짊어지고 왔는데,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복분자 술을 푸짐하게 담가 놓고 우리 집을 찾아오는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인심 좀 써 볼까 했는데 헛일이었습니다.

근데‘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다’ 라는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습니다. 세상 이치가 참으로 공평한 것 같습니다. 없이 살다가 여기저기서 돈벌이가 생기니 허리가 아프고 새 장화까지 사 신고 기분 좋게 산에 오르니 산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돈벌이에 새 장화까지 사 신었지만 그 대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산에 자주 오르지 못해 건강을 잃었고 산딸기를 잃었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예전처럼 적게 벌어 적게 먹을 만치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면 산에 꼬박 꼬박 다녀 허리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었고, 또한 산딸기로 복분자 술을 담갔을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렀습니다. 산딸기를 찾다가 아주 우연히 청둥오리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청둥오리는 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오는 철새로 알고 있었는데, 장마철에 청둥오리라니 설마했지만 눈앞에서 날아간 그 새는 분명 갈색 깃털로 얼룩진 청둥오리였습니다. 청둥오리는 불과 1미터도 채 안 되는 바로 코앞에서 날아갔습니다. 서로가 놀랐습니다. 나도 놀랐고, 분명 청둥오리는 더 놀랐을 것입니다.

아, 청둥오리가 날아간 그 자리에는 둥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계란보다 약간 큰 열 두 개의 알이 있었습니다. 겨울철새, 청둥오리는 장마철에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노루와 먼발치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가슴이 뛰었습니다. 산딸기를 따지 못한 내게 청둥오리가 알을 낳아 줬던 것입니다.

a 산딸기 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열 두개의 청둥오리 알

산딸기 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열 두개의 청둥오리 알 ⓒ 송성영

나는 산딸기를 까마득히 잊고 흥분된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캠코더를‘플레이’ 시켰습니다. 양동이에 산딸기를 얼마 담지 못했지만 그 대신 품기 시작한지 최소한 열흘 이상 지난, 매끈한 열두 개의 청둥오리 알을 캠코더에 담았습니다.

평소처럼 산딸기를 따기 위해 그곳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면 아마 청둥오리는 그곳에 알을 낳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동안 산행을 하지 않아 허리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지만 사실 나는 어미 품에서 생명을 키워 가는 그 열 두 개의 알을 통해 이미 치유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청둥오리의 알을 생각하면 기분이 무척 좋아집니다. 조만간 알을 깨고 나와 먹이를 달라고 입을 쩍쩍 벌릴 아기 청둥오리들을 만나게 될 것을 상상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캠코더에 담긴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집 식구들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또 기분이 좋습니다.

a 장화를 신고 두어시간 동안 산을 헤멘 수확이랍니다. 플라스틱 양동이가 좀 부끄럽더군요

장화를 신고 두어시간 동안 산을 헤멘 수확이랍니다. 플라스틱 양동이가 좀 부끄럽더군요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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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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