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에도 온 동네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다

박철의 <느릿느릿이야기>

등록 2003.07.17 06:16수정 2003.07.1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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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박철
여름 꼭대기, 오늘은 삼복 중 초복(初伏)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된 셈이다. 아침부터 마을 방송이 시작되었다. 서현진 이장은 아침부터 사람들의 귀를 붙잡는다.


“지석리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무더위가 시작된다는 초복입니다. 오늘 초복을 맞이하여 우리 지석리 전 주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기 위하여 친선 게이트볼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니 지석리 주민 여러분께서는 요즘 농삿일로 바쁘시겠지만 잠시 일손을 놓으시고, 오늘 게이트볼 경기에 많이 참석해 주셔서 즐거운 하루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느릿느릿 박철
이번 행사를 위해 지석리 노인회를 중심으로 부녀회, 청년회가 연합하여 여러모로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오늘 점심 메뉴는 복날을 맞이해서 특별히 영양탕을 준비하였사오니 전 주민 여러분께서는 한사람도 빠지지 마시고 참석하시어서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장의 마을방송은 지난번 MBC-TV방송 출연 후 점점 더 세련되어 가고 있다. 오늘 날씨가 초복이고 보니 더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9시가 조금 넘자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지석리 게이트볼 회장 차학천씨가 대진표를 짜느라 각 팀 대표들과 분주하다.

느릿느릿 박철
게이트볼 출전팀은 40대 남자, 50대 남자, 60대 남자, 70대 남자, 교회 팀, 여자 A팀, 여자 B팀 도합 8팀이다. 우승후보는 실력이 비슷비슷해서 장담할 수 없다. 우리 동네 게이트볼은 70대 노인들이 제일 먼저 시작했는데, 지금은 전 마을 주민들에게 보급되어 실력도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노인회부회장이 심판위원장으로 경기 규칙을 당부한다.

“잘 들으세요. 각 번호를 부르는데 세 번 불러도 대답 안 하면 실격입니다. 각 팀 코치 외에는 작전 지시를 하면 안되고, 아웃된 볼은 심판 외에는 건드리면 안됩니다. 나머지 룰은 여러분들이 잘 아실 테니 심판의 지시를 따라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느릿느릿 박철
“네”하는 대답이 개미 소리 만하다. 이미 게이트볼 룰은 다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제일 첫 경기는 60대 남자 대 40대 남자의 경기였다. 40대는 게이트볼은 늦게 배웠지만 파워가 있고 머리회전이 빨라 최근 실력이 많이 늘었다. 60대 남자는 우리 동네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60대 방현일씨가 1게이트를 보기 좋게 통과한다.

“야 이제는 실력이 프로급이야. 강화대회 몇 번 나갔다오더니 이제는 완전 고수가 됐시다.”


다음은 40대 한기배씨 폼을 잡고 볼을 쳤는데 볼이 살짝 빗나가고 말았다. 어째 40대가 기가 죽은 듯 하다. 60대는 거의 모든 선수들이 1관문을 통과하여 볼이 2게이트 쪽에 몰려있다. 40대는 3게이트 쪽을 중심으로 볼이 흩어져 있다. 오봉섭씨에게 기회가 왔다. 어지간한 거리이다. 앗, 그런데 볼을 맞추지 못하고 지나간다.

“어이구 저런! 고걸 못 맞혀. 내가 살살 까라고 했잖아!”

느릿느릿 박철
40대가 시간이 지날수록 안되고 꼬인다. 1게이트도 두 차례나 통과하지 못했던 한기배씨가 보기 좋게 1게이트를 통과하여 상대방의 공을 모조리 까서 밖으로 내쫓는다. 40대 남자들의 부인들의 응원이 시작되었다.

"야 늦바람이 더 무섭다고 1게이트도 몇 번 실수 하더니만. 제일 늦게 나와서 다 잡아버렸네."

내가 사진을 찍다가 아람 엄마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아람 엄마는 남편이 40대로 출전했고, 시아버지가 60대 남자 선수로 출전했다.

“누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아무나 이겨도 좋겠어요.”
“정말로?”
“실력은 60대가 나은 것 같은데, 기왕이면 40대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느릿느릿 박철
느릿느릿 박철
그러면 그렇지! 그러나 경기 결과는 40대가 60대에게 2점차로 지고 말았다. 아람 할아버지가 한 말씀하신다.

“이래 봐도 우리가 강화군 대회에서 준우승한 팀이야. 어디서 까불고 있어. 얕보지 말라구!”

마을 회관 앞에서는 구수한 개장국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리고 본부석에서는 노인 어르신들이 개장국 국물을 안주로 약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정담을 나누신다. 날씨는 올 들어 제일 더운 것 같다. 나는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다음은 교회 팀과 50대 남자 팀과의 대결이었다. 나도 교회 팀 선수로 출전했다. 교회 팀의 대표선수들이 다 자기 나이에 맞춰 빠져나갔기에 선수가 한 사람 모자란다. 하는 수 없이 여자를 한사람 집어넣었다. 서현옥 집사다. 내가 한마디했다.

“서 집사님. 져도 되는 경기니까 떨지 말고 해요. 서 장로님이 코치니까 코치가 손짓하는 방향으로 볼을 보내요. 파이팅!”

느릿느릿 박철
경기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교회 팀이 강력한 우승후보를 큰 점수 차로 이겼다. 미안했다. 서 집사가 너무 잘해서 이겼다. 남편 오봉섭 권사가 입이 벌어졌다. 자기 마누라가 잘해서 이겼다고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니, 덩달아 기분이 좋을 수밖에….

경기가 계속되는 동안 구경하던 사람들은 마을 회관에 점심식사를 한다. 복날이라고 개를 잡아 개장국을 끓였는데 빠질 수 있나. 사람들로 회관이 금방 가득해졌다. 동네사람들이 구수한 농을 하며 국밥을 잡수신다.

“야 국물 한번 진하다. 노인네들 잘 먹으라고 흐물흐물 잘 끓였구만, 국물이 이래야 돼. 그래야 좋아. 야! 국물한번 시원하다!”

느릿느릿 박철
곧이어 면장님도 면직원들과 함께 오셨다.

“지석리 마을이 단합이 잘 된다고 소문났어요. 초복에 이렇게 큰 잔치를 베풀고. 정말 보기 좋시다.”

교동면 초임으로 오신 박윤원 면장은 젊고 성격도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시다.

청년회에서 대형 선풍기를 두 대를 본부석에 갖고 와서 돌린다. 바람 한번 시원하다. 경기는 점점 더 무르익어 간다. 마을회관에서는 노래방 음악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뽕짝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할머니들이 춤을 추시는데 이 더위에 격렬하게 몸을 흔드신다.

“야 좋구나. 목사님도 나랑 한번 손 붙잡고 춤춰 보게시꺄?” 내가 사진 몇 방 찍고 질색을 하고 도망쳐 나왔다. 초복, 지석리 마을사람들의 복맞이 행사가 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끌벅적하다.

느릿느릿 박철
오후 내내 동네사람들은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해가며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고 이따금 탄식을 하기도 하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나만 다른 시간약속이 있어 빠져 나왔다. 사진을 150장을 찍었다. 땀으로 수건이 흠뻑 젖었다.

초반 1회전에 떨어졌던 40대 남자팀이 패자부활전을 거쳐 결승에 올랐다. 여자 A팀도 예상외로 여러 강팀을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 40대 남자팀과 맞붙었는데 결과는 40대 남자팀이 여자 A팀을 이기고 우승을 했다. 교회 팀은 4등을 했다. 4등 상품은 가루조미료 한 봉지였다. 초복, 지석리 온 동네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하나가 되었다.

복날은 복날인가 보다 엄청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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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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