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88

장일정 제왕비를 얻다. (5)

등록 2003.07.19 13:05수정 2003.07.1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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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정은 내원 소속 의원들로부터는 철저히 배척되었지만 외원에서는 사정이 약간 달랐다.

인정 넘치며 다정다감한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된 몇몇 젊은 의원들과 성품이 강직한 의원들이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무튼 장한의 뒤를 따라 기린각에 당도한 장일정은 철기린의 총애를 받는 빙기옥녀 사지약의 처소로 안내되었다.

전각의 밖에서 초조한 듯 서성이던 철기린은 의원 복장을 자가 오는데 이외로 젊다는 것이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빛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허어! 왜 이리 늦었느냐?"
"죄, 죄송하옵니다. 무천의방 당직사령실이 비어 있어 약간 지체되었습니다. 뭐하시오? 어서 인사드리시오. 기린각주이십니다."

허리가 반으로 꺾인 듯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호위무사의 말에 장일정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란각주? 기린각주라면… 헉! 차기성주인 철기린이잖아.'


오늘 처음으로 내원에 왔기에 기린각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습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앞서가는 호위무사를 무심코 따라오기만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천하에서 가장 깊다는 구중심처에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놀라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소성주님! 당직 사령이 없어 대신 무천의방의 부방주를 뫼셔왔습니다."
"무어라? 무천의방의 부방주? 흐음! 부방주라… 그렇다면 자네가 소화타 장일정인가?"

"헉! 어찌 소성주님께서 소생을…?"
"하하! 이거 반갑네. 그렇지 않아도 전에 제일호법께서 자네에 대해 하는 말을 들은 바 있었네."
"……!"

장일정은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인물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운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자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게. 환자가 정신이 혼미한 듯하니 자세히 좀 살펴주게."
"조, 존명!"

장일정은 자신이 왜 불려왔는지를 깨닫고 황급히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기린각은 천하에서 가장 진귀한 것들로 채워진 그야말로 보물창고이다. 들어서는 순간 발목까지 푹 잠기는 파사국 양탄자부터 시작하여 눈에 뜨이는 모든 것들이 최상의 물건들이었다.

열 사람이 누워 잘 수 있을 만큼 넓은 침상은 호두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보일 듯 말 듯한 엷은 휘장은 신비스럽게 보였다.

"빙기선녀라 하네. 장차 무림천자성의 성주 부인이 될 사람이지. 조금 전에 이유 없이 정신을 잃었네. 잘 진맥해 주게."
"조, 존명!"

실내의 기물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던 장일정은 철기린의 나직한 음성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침상에 누워있는 여인의 맥문을 짚었다.

'흐음! 소갈병이군. 소중인 것 같은데…'

진맥 결과 빙기선녀는 소갈병(消渴病)에 걸려 있었다.

소갈에는 소갈(消渴), 소중(消中), 소신(消腎)의 세 가지가 있다.

열기가 위로 올라오는 것을 심(心)이 허하여 받게 되면 심화(心火)가 흩어지는 것을 수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슴속이 번조(煩燥)하고 혀와 입술이 붉어진다. 이렇게 되면 목이 말라 물을 많이 마시고 오줌을 자주 누는데 양은 적다.

이런 병은 상초(上焦)에 속하는데 소갈이라고 한다.

중초(中焦)에 열이 몰린 것을 비(脾)가 허하여 받게 되면 잠복되어 있던 양기가 위(胃)를 훈증[蒸]하기 때문에 음식이 빨리 소화되어 배가 금방 고프다.

그러므로 음식을 평상시보다 곱으로 먹게 된다. 그러나 살은 찌지 않는다. 그리고 갈증은 심하지 않으나 답답하고 오줌을 자주 누게 되는데 오줌 맛이 달다.

이런 병은 중초에 속하는데 소중(消中)이라고 한다.

하초(下焦)에 열이 잠복되어 있는 것을 신(腎)이 허하여 받게 되면 다리와 무릎이 여위어 가늘어지고 뼈마디가 시리며 아프고 정액이 소모되며 골수(骨髓)가 허해지고 물이 당긴다.

그러나 물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물을 마시는 즉시오줌이 나오는데 양이 많고 뿌옇다.

이런 병은 하초에 속하는데 소신(消腎)이라고 한다.

"어떤가? 심각한가?"
"……!"

철기린의 물음에 장일정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소갈병은 다른 질환과 달리 당장 생명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는 그런 병이다. 게다가 통증도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이런 병에 걸린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 병은 웬만한 의원들은 완치시키기 정말 어려운 고질 중의 고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저잣거리의 의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무천의방이 어떠한 곳이던가!

천하의 내노라하는 의원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의원만이 모인 곳이다. 따라서 무천의방 소속이라면 소갈병 쯤은 쉽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쉽게 대답하지 않은 것은 장일정의 신중한 성품 탓도 있지만 사부였던 북의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진맥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속단하지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장일정이 쉽게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직 진맥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철기린의 물음에 대답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떼려던 장일정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던 아주 미약한 맥 하나를 더 느낄 수 있었다.

'어라! 이건 뭐지?'

웬만해서는 감지조차 못할 정도로 미약한 그것의 정체는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하여 다시 한번 눈을 지긋이 감는 사이 철기린의 음성이 이어졌다.

"흠! 지금껏 방주가 직접 병세를 살폈는데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더니 갑자기 이렇게 정신을 놓은 것이네. 어떤가? 심각한 것은 아니겠지?"

차기 무림천자성의 안주인이 될 여인이라면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세심하게 신경 쓰던 장일정은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헉! 이, 이건…'

회임(懷妊)이었다!

맥으로 미루어 이제 겨우 열흘에서 보름 정도쯤 된 듯하였다. 따라서 웬만한 의원이라면 회임 했는지 여부를 짐작도 못 할 정도였다. 그만큼 희미한 맥이었던 것이다.

만일 깊이 신경 쓰지 않고 소갈병에 대한 처방을 하였다면 자칫 태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빨리 병세를 호전시키기 위하여 약을 세게 쓰면 낙태의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철기린은 물음에 대꾸조차 없자 은근히 화가 났다.

"심각한 가를 물었는데 어찌 대답을 하지 않느냐?"
"앗! 죄, 죄송합니다. 속하가 진맥하느라 그만…"
"흠! 그런가?"

장일정의 대답에 철기린은 얼른 굳은 얼굴을 풀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병세를 살피기 위하여 온 정신을 쏟았다는데 어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하여 약간은 계면쩍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장일정이 물었다.

"환자께서 복용하시던 탕약은 어디에 있는지요? 아, 여기 있군요. 이게 복용하시던 탕약인가요?"
"흠! 그렇다네. 방주가 말하길 하루에 세 번 반드시 때를 맞춰 복용시키라 하였건만 저지경이 되었는지라 아직 그걸 복용시키지 못한 모양이네. 그나저나 어떤가? 괜찮은 건가?"
"……!"

총애하는 여인이 병석에 누운 때문인지 오늘 철기린은 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장일정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게다가 무엄하게도 빙기선녀가 복용할 탕약을 손으로 휘휘 저은 후 맛까지 보고 있었다. 이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철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장일정이 하는 꼴을 보고만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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