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제례악, 광복 직후 사라질 뻔 하기도"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황병기 교수의 종묘제례악 강연

등록 2003.07.21 01:33수정 2003.07.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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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황병기 교수 강의 모습

황병기 교수 강의 모습 ⓒ 김기

여름 소나기가 느닷없이 쏟아지기도 한 금요일 저녁 국립국악원 이쪽저쪽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국악계 젊은 스타들이 출동하는 공연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립국악원 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극장에서의 강연을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

종묘제례악을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을 두고 고심해온 국립국악원이 국악연구실(실장 박일훈)을 중심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코자 준비한 강연이 지난 7월 18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있었다.


날도 궂고 또 국악원 내 다른 공연장에 관심을 끌만한 공연이 있어 과연 많은 사람이 모일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강연에 나선 이가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교수여서 그런지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한 달에 한번씩 전문가뿐 만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강연을 통해 종묘제례악에 한발짝 더 다가서기 위한 노력이라고 강조하는 박일훈 국악연구실장의 말도 있었기는 했지만, 아닌게 아니라 이날 강연은 국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예정된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겼지만 참석자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킬 정도로 흥미진진한 분위기였다.

a 강연의의를 설명하는 박일훈 국악연구실장

강연의의를 설명하는 박일훈 국악연구실장 ⓒ 김기

물론 이번 강연을 앞두고 종묘제례악 왜곡 논란과 관련해 황 교수와 입장을 달리 하는 일부 국악전문가들이 반발을 하기도 했으나 이날 강연에는 궁궐지킴이, 궁궐길라잡이 등 순수 애호가들이 주로 참석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번 강연을 통해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처음 공개되기도 하였다. 그 사실을 황병기 교수의 입을 통해 들을 때야 조금은 웃기도 하였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종묘제례악 그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이왕직 아악부는 자연 해체되었다. 일제에도 유지되었던 종묘제례를 위한 국악 기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자 조금의 융통성이 있고 자금이 있었던 사람들은 사진관이나 이발소라도 차려 먹고살 궁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럴 주변도 없고 종묘제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서는 사람들은 공식 기관이 사라진 후에도 모여 이런저런 모색을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구왕궁 아악부라는 사설 단체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때 월북작곡가인 김순남이라는 양악인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미8군 군악대장을 데려와 종묘제례악을 듣게 하고는 그 딱한 사정을 전해주었다.


아무리 서양인이고 군인이라 할지라도 그도 역시 음악인이었기에 종묘제례악의 가치를 단박에 인정하였다. 그 미군 군악대장이 구 이왕직아악부원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것이 당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레이션 박스' 교환권 수백장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개인들이 나눠 갖지 않고 후일 피난정부가 있었던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의 개원을 가능케 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때 그 일을 주도하였던 이가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이었던 이주환 선생이라는 설명을 옛날 이야기처럼 듣게 되었다.

이 부분은 성경린 선생의 저서 <국악의 뒤안길>에도 얻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였다. 개인적으로는 미군이 고마워 보기는 또 생전 처음인 사건이기도 하다.

a 강연 중의 황병기 교수

강연 중의 황병기 교수 ⓒ 김기

그렇다고 국립국악원의 전신일 구왕궁아악부의 이후 행로가 평탄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원래 이왕직아악부 자리는 미군 병사들이 점령하여 악사들은 피사의 사탑보다 더 기울어져 언제든 무너질 태세인 당주동의 허름한 이층에서 연습을 하였다.

미 군정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아악부원들이 한걸음에 달려간 옛 아악부에는 온갖 여자 나체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찾아간 사람들을 심한 모욕감에 빠지게 했다고 하니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종묘제례악은 사라질 뻔한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먼저 대대적인 악사 축소를 단행했다.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조선조 내내 수백명의 수준을 유지하던 아악부 인원이 단 6명일 때도 있었다. 그때 그 멸실의 위기를 넘기게 해준 이가 다나베 히사오라는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a 피아노를 치며 종묘제례악을 설명하는 황병기교수

피아노를 치며 종묘제례악을 설명하는 황병기교수 ⓒ 김기

소멸 직전까지 갔었던 종묘제례악은 참으로 많은 풍상을 겪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갓 만들어진 것보다는 낡고 오래 된 것에서 느껴지는 풍상의 미가 종묘제례악에 스며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음악 자체에 배여 있을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그 역사를 알고 대하는 이의 가슴에 크게 공명되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국내 가야금 독주곡을 최초로 작곡했다는 음악사적인 사실보다는 미궁의 작곡가이며 산조가 아닌 연주곡 형식의 가야금곡으로 일반에게 가야금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국악전도사로 더욱 친근한 황병기 교수가 전하는 종묘제례악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우선 황 교수는 무대에 피아노를 준비해두게 하고는 직접 보태평, 정대업 일부를 청강하는 이들에게 불러보게 하였다. 국악가요도 아니고 종묘제례악을 일반인들과 부른다는 이벤트가 우선 흥미로웠다.

딱딱한 강연을 예상했던 참석자들은 이미 황 교수의 농 섞인 강연에 무장을 해제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함께 불러보는 보태평은 장엄한 연주만큼이나 감동적이었고, 참석자 자신들도 무척이나 즐거워 하였다.

표면의 이유야 종묘제례악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이런 강연이 국악원에 마련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무래도 종묘제례악 왜곡 논란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한 황 교수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아래 관련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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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아와 종자기가 바로 우리 얘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악사들의 예술적 동기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정리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왜곡을 주장하는 입장인 이종숙 교수는 강연 말미에 질문을 통해 반박하였으나 학술회의가 아닌 강연에서의 짧은 질문과 답변은 결론 도출의 기회로는 충분치 않았다.

a 종묘제례악을 부르며 즐거운 웃음이 퍼진 참석자들 모습

종묘제례악을 부르며 즐거운 웃음이 퍼진 참석자들 모습 ⓒ 김기

종묘제례악에 대한 강연은 다음 달에도 계속 될 것이고 연말쯤에는 다양한 의견들을 총 망라하는 학술회의도 개최한다고 한다. 계속될 종묘제례악에 대한 일련의 노력과 연구는 동기야 어떻게 주어졌건 전보다 훨씬 더 폭넓은 관심을 끌게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결과 여부에 따라 양쪽의 표정이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종묘제례악이 세계에 자랑할 요소 이전에 우리 국민들이 향유해야 할 소중한 우리 자산이기에 어떤 방식으로건 자꾸 논의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어쨌건 종묘제례악 위로 쌓여지는 풍상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숱한 풍상을 겪고 오늘의 유장미가 더해졌듯이 종묘제례악의 아름다움은 계속 이어져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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