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BBC, 더 큰 위기의 '블레어 정부'

'취재원' 밝혀내 공개한 정부에 영국 국민 등 돌려

등록 2003.07.21 20:27수정 2003.07.22 15:43
0
원고료로 응원
자유 영국을 대표하는 두 축 BBC 방송과 토니 블레어 정권이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블레어 정권이 "이라크의 군사적 위협을 과장했다"는 BBC의 보도가 나온 이후 ‘마주 달리는 기관차’ 모양으로 서로를 비난해 왔던 블레어측과 BBC의 대립은 취재원으로 밝혀진 켈리 박사가 숨진 채 발견되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블레어 부도덕하다’며 비판한 BBC 보도 이후 ‘취재원’을 둘러싼 논란

이라크 전쟁에서 미-영국군 승리한 뒤 전리품을 운운하던 지난 5월 29일(이하 현지시간) 영국의 BBC 라디오 방송은 세상을 깜짝 놀랄만한 보도를 내보냈다.

국방부를 출입하는 앤드류 길리건 기자가 익명의 취재원의 말을 인용해 “45분내에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대량 살상무기를 실전에 배치할 수 있다고 발표한 영국 정부의 발언은 전쟁을 위해 이라크의 군사력을 과장한 것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BBC의 보도는 전쟁의 명분이라고 강조해 온‘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음에 따라 블레어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평소 공정한 보도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해 왔던 BBC의 권위는 블레어 총리가“정보를 왜곡하지 않았다”고 강변했지만 여론은 BBC쪽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 했다.

BBC 보도 이후 영국의 모든 언론은 ‘익명의 취재원’의 신원파악에 진력을 기울였다. 좌파 성향의 일간지 가디언 또한 2명의 전담 기자를 취재원 파악에 투입했다고 밝혔을 정도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취재원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은 언론보다 더 영국 정부가 필사적이었다.


6주 동안의‘취재원 사냥’끝에 드디어 지난 7월 10일 국방부가 그 신원을 확인해 줌으로써 일단락이 끝나는 듯 했다. 취재원은 이미 밝혀져 부시 대통령만큼이나 유명해진 전직 UN 무기사찰단의 핵심단원이었던 켈리 박사였다. 그는 UN의 자문관으로 91년부터 99년까지 이라크에 대한 생물·화학무기 사찰에 참여한 바 있다. BBC 취재에 응할 당시 그는 국방부 무기고문으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국방부가 켈리 박사의 신원을 공개하며 “켈리 박사는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은 만큼 보도는 무책임했다”며 BBC를 압박하는 상황에서도 BBC는 끝내 익명의 취재원이 누구인지를 밝히기를 거부했다.


국방부에 의해 신원이 공개된 켈리 박사는 15일 하원 정보·보안 위원회에 출석해 BBC 보도와 관련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켈리 박사는 “길리건 기자와 대화를 나눈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자신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자신은 취재원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회 증언 이틀 뒤인 지난 17일 켈리 박사는 자신의 저택 인근 숲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왼손 정맥이 흉기에 잘린 채 발견된 박사의 사인을 영국 경찰은 ‘자살’로 결정지었다. 그러나 켈리 박사의 사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조만간 ‘조사위원회’를 발족해 다각도로 사망원인을 분석할 예정이다.

신뢰도에 큰 타격받은 공영 BBC방송

a 지난 20일 BBC 방송이 캘리 박사가 취재원임을 확인하며 발표한 성명서. BBC는 캘리 박사의 사망에 조의를 표하면서도 ‘보도는 정확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20일 BBC 방송이 캘리 박사가 취재원임을 확인하며 발표한 성명서. BBC는 캘리 박사의 사망에 조의를 표하면서도 ‘보도는 정확했다’고 주장했다. ⓒ 지용민


켈리 박사가 숨진 뒤 3일이 지난 20일 BBC 방송은 공식 성명을 발표해 “켈리 박사가 BBC 보도의 익명의 취재원이 맞다”고 시인했다.

BBC는 A4 1장 분량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난 몇 주 동안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켈리 박사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서 “켈리 박사의 유가족들의 확인요구를 받고 이날(20일) 그가 취재원이었음을 공개하게 됐다”고 공개에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BBC는 또 “켈리 박사를 취재해 보도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길리간 기자 또한 성명서 말미에 “켈리 박사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과 의미를 정확히 전달했음을 확신한다”며서 자신의 보도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 언론들은 일제히 BBC 방송을 성토하고 나섰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BBC가 예전의 명성을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실정”이라며 “켈리 박사가 BBC에 했던 말과 주장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뒤따라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지인 선은 더욱 강경한 어조로 BBC를 비판했다.

선은 헤드라인 기사로 길리간 기자를 일컬어 ‘생쥐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살기 위해 켈리 박사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며 기자직 사퇴를 촉구했다. 켈리 박사가 하원 위원회에서 ‘자신이 익명의 취재원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길리간 기자와 BBC가 켈리 박사를 지명하며 취재원이었다고 확인하고 나서자 ‘그렇다면 켈리 박사가 거짓말쟁이인가’라며 BBC의 공신력에 회의를 표시했다.

선은 “만일 BBC 방송이 켈리 박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취재원이었다고 확인을 했더라면 켈리 박사가 죽음으로 향하진 않았을 것”이라면서 그가 사망한 뒤 72 시간 이후에 취재원으로 확인한 저의가 무엇인지를 따져 물었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BBC 방송은 “켈리 박사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보도 자체에 문제될만한 것은 없다고 확신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취재원 사냥’에 나섰던 블레어 정부, 국민 여론 등 돌려

켈리 박사의 사망으로 BBC가 곤경에 처한 그 이상으로 블레어 정부 또한 곤란한 지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를 비난하는 가장 큰 목소리는 ‘왜 정부가 BBC 보도에 등장한 익명의 취재원을 사냥해 공개했는가’에 집중돼 있다. 보수성향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 여론조사결과 응답한 유권자 중 71%가 켈리 박사의 이름을 공개한 정부의 처신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가디언지는 “정부가 켈리 박사의 신원을 확인하려는 여타 매체에 대해 어느 정도로 호의를 베풀었는지” A4 2장 분량의 기사에서 소상히 밝히고 나섰다.

가디언은 “언론 브리핑을 하는 담당자가 ‘익명의 취재원은 기술전문가이며 영국 정부부처 여러 곳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국방부에서 일하고 있다’고 알려줬다”고 보도했다. 이어 ”취재기자가 해당자의 리스트를 요구하자 정부는 11명의 이름을 알려줬다”면서 “11명 중에서 정부가 알려준 경력자를 선별하니 켈리 박사가 나왔다”며 익명의 취재원이 정부의 도움으로 얼마나 쉽게 확인됐는지를 자세히 보도했다. 가디언은 “영국 국방부는 켈리 박사의 이름이 대중에게 폭로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는 자사 취재기자의 말을 전했다.

켈리 박사의 사망소식을 접한 뒤 블레어 총리가 보인 태도에 관해서도 말들이 나오고 있다.

20일 BBC에서 ‘켈리 박사가 취재원이 맞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자 블레어 총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BBC 방송에서 켈리 박사를 확인해줘서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블레어는 또 “켈리 박사의 사망에 책임이 있다며 총리직 사퇴 압력이 거세지만 나는 사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켈리 박사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블레어 총리는 美의회에서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내려 치른 전쟁이었다 할지라도 역사는 용서해줄 것”이라고 말해 동맹군 미국으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켈리 게이트‘ 소모전으로 끝날 가능성 높아

영국 국민들은‘켈리 박사의 사망에는 내부자 색출을 통해 그를 전격적으로 공개해 버린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BBC 방송은 한 영국인의 말을 인용해 “켈리 사망을 조사하게 될 위원회는 왜 영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게 됐는지도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앞으로의 역사는 모르겠지만, 현재 블레어 총리의 국민들은 켈리 박사의 죽음으로 인해 더더욱 블레어 총리를 용서하지 않을 분위기다. 한 무기사찰 전문가의 죽음으로 인해 영국은 ‘전쟁명분’을 놓고 뜨거운 공방이 벌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켈리 게이트’는 책임전가식 공방으로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늘 그렇듯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3. 3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4. 4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5. 5 국방부의 놀라운 배짱... 지난 1월에 그들이 벌인 일 국방부의 놀라운 배짱... 지난 1월에 그들이 벌인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