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한글날과 한글학회

등록 2003.07.28 12:43수정 2003.07.2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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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은 '시월훈민정음성(是月訓民正音成)'이라는 구절을 보고 음력 9월 말일을 근거로 삼아 제정하였고, 훈민정음 반포 후, 480년만인 1926년 음력 9월 29일, 양력 11월 4일에 당시의 문화기관인 조선어학회와 신문사가 공동주최로 서울 식도원에서 처음으로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이 자리에서 그 명칭을 '가갸날'로 정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2년 간 그렇게 불러오다가 1928년 '한글날'로 개칭하게 된다. 또 1932년까지 5년 간 매년 음력 9월 29일에 거행하던 기념식을 양력으로 환산해 달라고 하여 마침내 10월 29일이 옳다하여 1931년부터는 양력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양력이 그레고리 법황의 '그레고리'역이며 1582년 이전은 '유리우스'역을 사용하였다는 점에 비추어 반포된 해인 1446년은 단기 3779년이므로 이것도 역시 하루의 차일망정 현재 쓰는 역으로 본을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1934년부터 10월 28일로 고치게 되었는데 그 후 중일전쟁이나 1942년 9월 5일에 시작된 조선어학회회원 피검 사건 등 점차 혹심해져 가던 일제 침략정책은 마침내 '한글날' 기념 행사조차 중지케 했던 것이다.

한편 1940년 7월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의성군 어느 고가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은 전형필 씨가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편이 33장으로 된 원본임이 확인되었다. 이 책에 정인지 서문의 '세종 25년 9월 상한(上澣)'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20일이 앞당겨진 10월 상순으로 잡고 10월 9일을 한글날로 삼게 되었다.

한 때 김민수 교수는 세종 25년(1443) 12월에 이미 훈민정음이 제정·반포되었고, 세종27년(1445) 4월에 용비어천가를 지어 시험하였으며, 세종 28년(1446년) 9월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책의 원고가 탈고된 날일 뿐이므로 훈민정음이라는 글자가 이미 완성·반포된 날이라고 볼 수 있는 세종 25년 12월 그믐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월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학계의 호응을 얻은 바 있으나, 이미 10월 9일로 굳어진 한글날을 또다시 바꾸어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별로 이롭지 못하다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훈민정음의 창제의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언어와 문자의 불일치에서 오는 모순을 제거하고 중국의 선진문화 섭취에 도움을 주어 모든 국민에게 문자혜택의 기회를 고루 있게 하였고, 둘째 제자(制字)에 있어서 대중성·실용성·과학성·합리성에 입각한 문자의 보편화를 꾀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서문에서도 국민들이 쉽게 배워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창제동기를 명백히 밝히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우수한 우리의 글자를 가졌다는데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글을 갈고 닦아 나가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한글학회의 활동을 주목하고 협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글학회는 지난 80년까지 한글날 기념식을 주관해 왔으나 제5공화국이 들어선 1981년 이후, 문공부로 그 행사권이 이양되었다. 이후로 한글학회는 한글날에 별도로 종로구 신문로 한글회관 강당에서 기념식을 열어 왔다.

오늘날의 한글학회는 지난 1907년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중심이 되어 운영한 하기국어강습소가 모태이다. 이 강습소를 통해 배출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이듬해 8월 31일 발족한 국어연구학회가 한글학회의 전신이다. 이후 이 학회는 조선어강습원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졸업생을 냈고, 1927년에는 동인지 <한글> 첫 호를 펴내기도 했다.


이 학회의 이름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바뀌었다가 해방 뒤인 1949년 9월에 현재의 한글학회로 다시 바뀌었다.

한글학회는 일제치하인 1942년 10월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혹독한 탄압을 받기도 했다.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 학회 관계자 33인이 일제의 조작에 의해 옥고를 치렀으며, 이윤재와 한징은 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는 한글학회 활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학술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라는 죄명을 씌웠던 것이다. 한글학회는 광복 뒤 지금까지 줄곧 한글전용운동, 우리말 순화운동, 한글기계화 운동을 빌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테면 이 학회가 1933년에 확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지금까지 국어표기의 기준이 되어 있다.

한글학회는 이러한 운동 외에도 한글의 연구, 통일, 발전이라는 전제아래 대규모의 사전편찬사업에도 힘을 쏟아왔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사전편찬작업에 들어가 1947년 <큰사전> 제 1권을 펴낸 뒤, 1957년에는 6권으로 된 대규모 <큰사전>을 완간(完刊)하는 한편, 1958년에는 <중사전>, 1960년에 <소사전> 1965년에 <새한글사전>, 1967년에 <쉬운말사전>을 연차로 펴내기도 했다. 특히 지난 1966년부터 전국 각지를 답사하면서 지명 조사 사업을 펼친 결과, 1984년에는 <한국지명총람> 20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글학회는 다달이 <한글새소식>을 발간하고 있으며 해마다 <한글>이라는 연구논문집을 간행하고 있다. 또 1967년부터 추진해 오던 큰사전편찬 작업은 1992년 1월 25일에야 비로소 <우리말큰사전> 3권과 <옛말과 이두사전> 1권을 간행함으로써 일단락 짓게 되었다.

또 1991년 정부에서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키자, 한글학회에서는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함께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해달라'는 백만인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것은 같이 처리된 10월 1일 '국군의 날'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뿐만 아니라 10월 24일 'UN의 날'이 없어졌다고 하여 서명운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세계에서 우리 민족처럼 우수한 문자를 독자적으로 가지게 된 나라가 어디 또 있는가?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제외시켜서 증가되는 생산력보다 그 날 하루 동안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새로운 재충전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가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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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영주고등학교, 선영여고 교사. 한국작가회의 회원. 대경작가회의, 영주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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