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역사 속의 다른 삶의 원주민

호주와 뉴질랜드를 가다

등록 2003.08.04 11:40수정 2003.08.0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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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아름다운 것이다. 보고 듣지 못했던 다른 삶의 양태를 맛보는 여정의 즐거움을 어찌 필설로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작렬하는 남국의 석양을 바라보다 객사의 저녁에 흐느끼는 여수(旅愁)를 온전한 여행자의 고독으로 남겨두는 것. 더러는 남십자성에 흐르는 미리내와 함께 밤새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얼마나 오롯하고 즐거운 일인가. 그렇게도 가고싶던 적도 밑 남반구의 나라 호주와 뉴질랜드를 8박 9일간의 여행길로 돌아 왔다.

여행 또한 우리 삶의 일부, 그렇다면 저 먼 북반구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내게 이 여행은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2003년 7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빙산의 일각이지만 호주와 뉴질랜드를 훑어보고 느낀 소회를 꿈을 꾸듯 적어보자.


직장에서의 일로 인해 우연한 기회를 맞게 되었다. 어떤 일의 성과로 모두 22명이 한 팀이 되어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당초에는 동남아를 연수코자 했지만 아시다시피 '03년을 강타한 사스로 인해 몇 달을 미루다가 7월의 중순, 결국 목적지를 선회하여 우리나라와 계절의 반대편, 호주와 뉴질랜드를 가게 되었다. 특별한 감독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보고 그 안에서 느낀 세계의 생각을 우리들의 삶과 일에 접목시켜보는 것.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생각을 만나는 신나는 일. 지금까지의 온갖 바쁜 일상일랑 물러가라. 술에 취하면 어떻고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어떠리.

전날까지의 야근의 기억을 아스라이 물리치고 우리는 7월 15일 12:20 광주터미널에서 웅성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익혔다. 그리고 출발. 5시간이 지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20:30에 호주의 브리스번을 향해 출발했다. 비행시간은 8시간. 비행시간 틈틈이 한승원 선생의 '초의'를 읽으며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브리스번에 도착하여 버스에 오르고 보니 07:00.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가지고 간 고추장과 김치가 들통났지만 행복했다.

호주는 세계지도를 보면 우리와 비슷한 경도에 있다. 시차는 우리보다 1시간이 늦다. 출발하기 전 두 나라를 공부했어야 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온다. 아무리 바쁘다해도 처음 가보는 나라에 대해 이처럼 무식하다니. 공항에서 처음 만난 그 나라 사람들이 의외로 작다. 그리고 몹시 뚱뚱한 사람들이 많다는 데에 놀랐다.

7월 16일

a 브리스벤 항구의 아름다운 모습

브리스벤 항구의 아름다운 모습 ⓒ 고성혁


브리스번 시내를 돌아봤다. 초대 총독의 이름을 땄다는 도시의 유래에서 호주 원주민 에보리진(Aborigine)의 아픈 과거를 떠올렸다.

200년의 호주 역사를 길이 간직하기 위해 그 총독청사를 문화재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하니 짧은 역사를 지키기 위한 안간힘과 함께 낮고 굵은, 시커먼 코를 가진 원주민의 한이 스멀거리는 듯 하다.


사실 호주는 영국 죄수들의 유형지였다. 아무도 가기를 거부하는 호주를 개발하기 위해 영국정부는 죄수들을 보내 호주를 개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호주의 백인들에게 조상을 묻는 일이 금기시된다고 한다.

총독청사 아래의 감옥에서 고국을 그리는 죄수 신분으로서, 한편으로는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사람이 아닌 오랑우탄 같은 유인원으로 취급하여 학살함으로써 멀리 사막지방까지 쫓아낸 초기 정착민으로서의 그들의 삶도 신산스러웠겠지만, 단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땅의 주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포한이야말로 뼈를 깎았을 듯하다.


브리스번을 더듬듯 살피고 골드코스트(Goldcoast)로 이동했다. 골드코스트는 객실수가 그 도시의 인구수인 20만에 육박하는 유명한 관광지. 돌고래 쇼는 사람과 함께 어우러지는 멋진 쇼였다. 우리에게도 쇼를 위한 쇼맨이 필요하지 않을까. 딱딱한 얼굴의 사회보다는 사람들의 호응을 유인하는 제스춰의 쇼맨과 흥미를 더하는 치어리더의 율동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나라 사람들은 참 잘 먹는 것 같다. 어떤 10대로 보이는 남녀아이들은 30분간의 쇼가 끝날 때까지 줄기차게도 기름진 고기를 먹어댄다. 쇼를 보는 사람들의 20%는 비만인 것 같다. 한국의 여성들이여, 호주를 만나시라. 뚱뚱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리니.

수상스키쇼를 관람했다. 마찬가지이다. 수상스키도 흥미로웠지만 쇼를 진행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이처럼 흥을 돋구면 반응이 어떻게 나타날까?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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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혁


Main Beach에 도착하여 가는 모래를 밟다. 내 고향 도초도의 시목해수욕장도 이처럼 가는 모래로 뒤덮여 있음을 생각하며 잠시 그곳을 어떻게 개발하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이곳 해안선은 45㎞나 이어진다고 한다. 가끔씩 지나가는 서양인들과 섞여 주눅들지 않고 공원에서 맛나게 팩 소주를 들이키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화장실에 설치된 변기와 세면대의 위치가 높은 것을 보며 다시 한번 백인들과의 체격차이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식사 후 일행들이 다시 어울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져온 소주와 냉장고의 맥주를 섞어 마셨다. 이름하여 폭탄주. 몇 순배를 돌리며 이곳이 어디인지를, 무엇하러 왔는지를 잊었다. 이곳 사람들은 지나친 음주를 절대로 금기시한다. 특히 술을 좋아하는 원주민들에게는 정해진 이상의 술을 팔지도 않고 술집에서도 술취한 사람에게 다량의 술을 팔아 사고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그 주인에게 묻기 때문에 술에 취해 건들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서양인과의 문화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바다를 건너서까지 '폭탄음주'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7월 17일

브리스번에서 시드니행 비행기를 탔다. 새벽 04:30 기상하여 기내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08:15에 시드니 도착. 공항검색대에서 덩치가 우람한 금발의 사내가 강한 액센트로 뭐라 말을 하는데 당황스러웠다. 아, 영어. 그 공부를 왜 이리 안 했는지. 만국공통어인 영어공부를 지금이라도 해야만 한다. 늙다고 생각하는 혹자들이여, 영어공부는 평생 해야만 하는 걸 명심해 주시길.

두 사람의 수하물이 나오지 않아 잠시 웅숭대며 담배를 피우다가 문득 쳐다본 하늘. 완연히 스산한 가을이다. 어둑한 하늘 아래 온갖 색깔의 사람들이 분주한 공항 로비에서 잠시 생각의 날개를 폈다.

시드니를 중심으로 호주에는 7만의 한국교포가 살고 있다. 우리나라가 IMF를 맞아 여행객이 뜸해지자 호주에 살고있던 교포들도 매우 어려움을 겼었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 정규영씨는 "한국에 감기가 오면 호주는 독감에 걸린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정 선생도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분으로 영상물을 취급하던 인텔리였는데 이 곳 호주에서 타일공사를 하며 돈을 모았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타일, 용접, 청소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할 게 없다. 사실 호주는 기능이 최고인 나라이니까. 이 나라에서는 현업에 종사하는 기능인들이 의사나 변호사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논리다. 고생하는 만큼 대접받는 게 무어 이상할 게 있는가. 이곳에서도 2002 월드컵 4강은 우리 교포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한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만리타향에서 고국을 늘 그리며 사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세계적인 축제와 그 개최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와일드라이프 파크(Wildlife Park)에서 크로코다일 악어와 코알라, 난쟁이펭귄 등을 구경했다. 동물원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고, Blue Mt에서 깎아지른 절벽과 세 자매 봉, 그리고 궤도열차와 케이블카를 탔다. 아름다운 경치였다. 건너다보는 절벽은 가슴에 서늘한 기운을 맴돌게 했다.

a 블루마운틴에서 건너다 보이는 절벽

블루마운틴에서 건너다 보이는 절벽 ⓒ 고성혁


특히 이곳은 과거 석탄을 캐던 탄광지였는데 그곳 시설을 잘 활용하여 관광지로 재구성하고 영국여왕을 초청, 시승을 시키고 매스컴을 통해 홍보함으로써 지금은 1년에 250만의 관광객이 20억원의 사용료를 내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사용료에 부가되는 유형 무형의 소득을 생각하면, 관광개발에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은 한국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었다. 맛있는 스테이크였다. 식사 얘기를 잠깐 하자.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인지 호주와 뉴질랜드 어느 곳에도 한국식 식당이 있었다. 한국식 밥과 김치가 존재하여 식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의 경우 오히려 한국보다 잘 먹어 살이 찔 지경이었다. 여행객들이여, 밥걱정 말라. 김치가 없다면 며칠쯤 부대끼며 현지의 식문화를 살펴봄이 어떨지.

사실 호주는 백호주의 나라이다. 여행이 끝난 후 호주 역사를 살펴보니 원주민 학살과 동양인 배척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영국은 1850년까지 40만의 죄수들을 이 땅에 유배시켜 마치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하는 양 원주민을 학살하고 나라를 건설했다. 그런 다음 사금을 캐기 위한 골드러쉬에 힘입어 부족한 노동력을 중국으로부터 들여왔으나 어디서나 잘 적응하는 중국인들이 똘똘 뭉쳐 독자적으로 행정구역을 만드는 등의 피해가 속출함으로써 색깔 있는 인종을 배척하기 시작해 1970년대까지 백호주의(白濠主義)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원주민을 무참히 학살한 냉혈한의 백호주의는 어쩌면 섬뜩하기까지 한다. 지금은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고 오히려 아시아와 가까운 이웃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 나라 사람들의 우월과 피해의식이 숨어 있을 것이다.

"Qeen save our country!"를 외쳤던 호주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세계도처에는 54개의 영국령이 있다고 한다. 신사의 나라 영국. 영국을 모태로 한 미국을 포함하여 영국으로부터 비롯된 나라들. 글쎄올시다. 지금 원주민들은 보호구역이라는 미명 아래 불모지인 사막의 한 귀퉁이에서 씨가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읽고 검고 낮고 굵은 코의 그들이 안쓰러워졌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어쩌면 생존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풍부한 먹을거리와 따뜻한 태양이 있음으로써 목숨을 걱정하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에서 역사의 흐름은 냉엄한 생존의 법칙임을 다시금 실감한다.

신대륙 발견 500주기가 되던 1992년, 당시 발견을 주도했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이제까지 세계를 지배해왔던 '정복'과 '경쟁'의 논리를 반성하고 '협력'과 '상생(相生)'의 논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19명의 리스본그룹을 떠올리면서, 학살도 반성도 먼저 생각하고 실천도 먼저 생각하는 서양의 그런 모습이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하고 결국, 이 우월한 생존의 법칙이 오래갈 것이라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러나 200년의 역사 호주와 뉴질랜드나, 250년의 역사 미국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 1만7000달러의 뉴질랜드와 2만달러의 호주, 그보다 더 많은 미국. 이제 갓 1만달러의 국민소득인 우리. 부가 역사와 정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이 우리보다 잘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호주의 가이드 정 선생은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골똘히 생각해야 될 화두가 아닐까.

시드니 타워 레스토랑에서 뷔페로 식사를 했다. 대부분의 손님이 한, 중, 일의 동양인들이었다. 식사는 서양식인지라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시내를 내려다보는 '느낌'으로 식사를 했다. 타워는 천천히 돌아가고 시내의 불빛은 바다와 닿아 이글거리고. 저녁식사 후에는 Aquarium에서 심해상어를 비롯한 바다동물들을 살펴보고 사진촬영을 했다. 이후 Darling Harbor에서 선상야경을 관람했다. 천천히 부유하듯이 시드니의 불빛 찬란한 야경을 보며 적벽대전의 연환계를 생각해낸 나는 바보인가. 온통 불빛으로 가득한 바다는 사실 내 꿈이다. 공직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얻고자, 이룩하고자하는 지역개발의 목표이다. 아, 언제 저 전라도의 불꺼진 항구에 이 휘황한 불을 놓을 것인가.

선창에 배를 묶는 사람은 묘령의 금발 아가씨이고 선장은 중년의 금발. 한 쌍의 조화로운 하모니를 보며 이것마저도 관관상품이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됐다. 그 날 불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나는 'SAMSUNG'은 내 자긍심을 부풀게 했다.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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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혁


아침밥을 잘 먹었다. 된장국에 날아갈 듯한 밥알의 안남미 쌀밥이었다. 삼성핸드폰을 자랑하는 John과 오페라하우스가 보이는 언덕바지에서 사진 한 컷. 그리고 죄수를 가둬놓았다는 바다 위의 감옥을 바라보며 빠삐용을 기렸다. 죄수들. 영국에서 유형 온 죄수들이 갇혔을 저 감옥. 그런 이유로 감옥과 같은 아파트를 싫어하는지 아파트가 거의 없다.

호주의 사회안전망은 뉴질랜드와 더불어 최고수준이다. 재정적 부담으로 축소하는 경향이긴 해도 현재 아이들 부양을 위해 월 60만원의 부양수당을, 실직자에게는 남녀불문 월 120만원씩을 지급하고 출산의 경우 출산장려금으로 2000만원을 준다고 한다. 가이드는 웃으면서 "호주에서는 아이만 많이 낳으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라고 얘기했다. 물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고율의 세금을 부담해야 하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로 살 수 없는 시스템인 만큼 국민들은 이런 시스템에 찬성한다고 한다. 세상일에는 반드시 두 얼굴이 있고 그것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니 더 나은 제도와 방법을 위한 변증법적 탐험은 계속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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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혁

틈새공원(Gap Park)의 낭떠러지와 푸른 남태평양의 무한한 바다를 살피는 일도 즐거움이었다. 머리를 날리며 이 곳을 또 언제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어쩌면 내 생애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 두고두고 잊지 않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이와 같은 절벽은 어찌하여 생겨났을까. 호주는 학자들에 의하면 지구 판의 충돌에 의해 생겨났다고 한다. 판과 판이 충돌하여 그 충격에 의해 바다 밑으로부터 갑자기 융기했다고 한다. 먼 옛날의 지구생성이 그려진다. 지구의 신비로움과 알 수 없음이 갑자기 전율로 다가선다. 유카탄반도에 지구 밖의 혜성이 날아와 부딪침으로써 히말라야 산맥이 솟구쳤다는 가설과 함께 호주의 생성 내력을 듣고 나서 지구의 경이로움과 미래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절로 심호흡을 했다.

본다이 비치의 전경이 내 고향 전라도 신안의 대광해수욕장의 모습과 너무 흡사했다. 마치 항아리 모양의 해안선이 전혀 낯설지 않다. 파도가 조금 넓고 크고, 똑 같이 가늘디가는 모래. 많은 서양사람들이 아기들과 함께 놀고 있는 광경은 우리네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어젯밤의 야경을 떠올리며 호주대륙을 발견한 제임스 쿡의 이름을 딴 Captain Cook Cruises를 타고 선상관광을 했다. 1시간 30분 코스인 이 크루즈는 점심을 먹으면서 관광을 할 수 있는 유람선이었다.

식사를 하고 밖을 나와 보니 오, 푸르디푸른 바다와 맞닿은 바위와 수목이 장관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집들의 푸른 정원. 온통 잔디밭인 광경과 자연과 조화로이 어우러진 공원들. 같은 모양의 건물이 단 한 채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투구모양인가, 독수리의 형용인가. 멀리 보이는 오페라하우스가 한 폭의 그림처럼 떠 있었다. 미항 시드니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항구를 만들 수 있을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목포여, 여수여. 우리들의 항구여. 200년만의 선진국 진입이라는 저력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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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혁


배에서 내려 오페라하우스를 직접 살펴봤다. 계단도 걷고 온 김에 아이들 기념 티셔츠도 한 장씩 샀다. 네델란드 건축가의 설계에 프랑스제 유리, 스웨덴 타일 1,056천장을 못 대신 리벳만을 사용하여 만들어냈다는 거대한 건축물을 계단에 앉아 물끄러미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꿈이다.
코 큰 친구들 사방에 널려있고
바다는 드세게 푸르다.

기죽지 마라. 사는 것은 마찬가지
비록 이런 강고함은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옹골진 포한 넘치니
꿀릴 것도 사무칠 것도 없다.

너희의 오페라하우스도 내게는 그저 하우스일 뿐
널찍한 네 자리에서 눈을 감아도
내게는 아홉 구비 애간장과 저녁연기 해거름의 낮은 초가 울 바자
그 안에 오롯이 담긴 섬돌 위의 고무신이 떠오르나니

너를 스치는 바람처럼 나는 간다.
얼마간 지나 네 얼굴이 떠오르면 그때
고향 집 외양간의 때묻은 기둥에 기대듯 슬몃
너를 어루만져 주마.
2003. 7. 18 오페라하우스에 앉아서


그래, 사는 것은 마찬가지다. 너희는 고기를 썰고 우리는 된장국을 먹는다. 너희는 너희의 삶과 가치가 있고 우리는 우리 것이 있다. 너희가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없듯이 우리도 너희의 모습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너희의 모습을 강요하지 마라. 문화적 다양성과 그것을 존중하는 배려 속에서만 인간의 발전이 있을 수 있는 것. 뭐, 기죽을 거 있느냐.

그 날 저녁 한국식당에서 맛있는 김치찌개에 소주를 곁들여 실컷 포식을 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여 우리들의 문화대로 거나하게 소주를 돌리고 룸메이트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잤다.

7월 19일

뉴질랜드로 떠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춰 일어나니 취기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취기로 인해 더욱 재미있어진 룸메이트는 우리 일행을 시종 웃겼다.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기는 한 시간이 늦어져 있었고 그리하여 타는 목마름으로 물을 찾았지만 물을 파는 자판기는 고장이었다. 그냥 수돗물을 마셨다. 그리고 두 번이나 화장실을 다녀야 했다.

09:00에 떠난 비행기는 01;40에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호주와 시차는 2시간, 결국 뉴질랜드는 우리나라보다 3시간이 늦다. 오클랜드 시내를 관광했다. 에덴공원에 들러 오클랜드 시내를 둘러보니 건물군(建物群)은 눈에 띄지 않고 숲 반 집 반이다. 나무에 둘러싸이고 발 뿌리에는 잔디가 가득한 집들을 보노라니 눈이 맑아 진 듯하다. 미션베이(Mission Bay)를 산책하다가 그곳으로 휴가여행을 온 동료여직원을 만났다. 국내도 아니고 국외에서 조우하다니.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지르는 우리 일행을 그곳의 키위들이 쳐다봤다. 뉴질랜드에는 3대 키위가 있다고 한다. 먹는 양다래 키위, 새의 한 종류인 키위. 그리고 금발의 서양인을 지칭하는 키위.

뉴질랜드의 인구는 400만. 우리나라의 28배에 이르는 호주도 현재 1950만일 뿐이니 우리의 2.5배에 해당하는 뉴질랜드의 인구도 호주에 비하면 결코 작은 것은 아닐 것이다. 뉴질랜드 인구 3분의 1인 140만이 이곳 오클랜드에 모여 살고 있다. 140만이면 작은 도시라고 할 수 없음에도 일부 시내를 제외하고는 큰 건물이 전혀 없었다. 모든 집들이 넉넉한 뜰을 갖고서 나무와 함께 호흡하는 푸른 모습이었다. 뉴질랜드에는 우리 교민 2만 2천명이 살고 있었다.

호주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늦가을 날씨처럼 싸늘하다.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99년 김대중 대통령이 묵었다는 Calton Hotel에 투숙했다. 방 기운이 싸늘하다. 가이드 최진호씨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호텔까지 그런 것인가. 룸메이트는 감기에 걸려 있고 방은 춥고. 난방을 표시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맹랑한 일이 있나. 9시쯤 되 방을 둘러보기 위해 올라온 최 선생더러 얘기했더니 난방시설은 되어 있지만 고장이라며 방을 바꿔 주었다.

7월 20일

된장국에 하얀 쌀밥. 아침식사를 잘 먹었다. 가지고 간 고추장과 깻잎으로 입맛을 돋우며 너무나도 맛있게 먹었다. 팍팍하고 어설픈 스테이크와 비교할 수 있나, 암.

호주도 마찬가지지만 뉴질랜드도 6.25 참전국이었다. 아침, 장미공원에 들러 바다를 보며 서있는 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44명의 뉴질랜드 병사들 전원이 한국전에서 전사했다. 한국어로 '영원히 기억하리'라고 씌어 있었다. 가이드 최 선생은 이곳말고도 우리와 관계된 곳이 또 있으며 그곳을 들를 것이라고 한다. 푸른 잔디가 온통 드리워진 그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던 아저씨더러 기념촬영을 하자고 했더니 친절하게 응해준다. 사진을 찍고 나서 사진기를 보더니 "삼성?"하며 반긴다. "응?" 이 인간이 삼성을 아는가? 그는 이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삼성표시를 보여주며 삼성이 좋은 제품이라고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 이 사람아. 한국산 최고여! 덩달아 내 마음까지 상쾌해진다.

뉴질랜드는 남극 빙하로부터 1억 5천만년 전 분리된 남 섬과, 1억 4천만년 전 화산 폭발로 융기된 북 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 섬에는 만년설에 둘러싸인 산들이 수두룩하고 날씨도 훨씬 춥다고 한다. 우리가 서있는 북 섬은 화산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이 곳도 영국령의 하나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호주와 비슷한 시기에 건너왔지만 뉴질랜드에 도래한 영국인들은 양심수들이었다고 한다. 호주가 일반 범죄자들의 유형지였다면 그보다 먼 뉴질랜드는 여성참정권을 부르짖은 양심수들이 건너왔다. 따라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합리'를 가장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찾으려 한 것 같다. 조약을 맺고 계약이라는 미명아래 야금야금 땅을 뺏은 다음 이에 반발하는 마오리족과 전쟁을 하고 전쟁 후 원주민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땅값을 재 지불하는 일련의 과정이 합리적이고 온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낯두꺼운 의도적 계획으로 여겨짐은 나만의 느낌일까. 그러나 지금의 뉴질랜드는 원주민인 마오리족을 본토인으로 여기고 이들을 위해 많은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마오리들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자긍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같다. 관광수입, 땅과 바다에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수익들도 모두 마오리를 위해 쓰여지고, 의회 의원비율도 마오리 인구에 적정 비례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고난한 역사 속에 늘 약자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 처지를 돌아보며 다소 안심이 되었다.

이런 느낌은 그들 국가의 전통문화로서 모두가 아끼고 존중하는 마오리족들의 강인한 율동과 씩씩함이 돋보이는 '전통 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생김새로 보아 호주 원주민은 아프리카에서, 뉴질랜드 원주민은 적도의 폴리네시아에서 유래되었고 따라서 그 모습이 무척 판이하다는 점이다. 독립국임을 선포했음에도 영국여왕의 생일이 최고의 국경일이라는 나라, 호주와 뉴질랜드. 참 세상은 넓고 그 안에 재미있는 일들도 많다.

산언덕 위에 지어져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스카이라인에서 뷔페로 점심을 먹었다. 뉴질랜드의 유명 관광지인 그곳에는 여러 가지 놀이기구가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스릴을 즐기는 공중 그네 타기였다. 세 줄의 와이어로 묶여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전속력으로 낭떠러지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그곳에 금발의 아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서양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깔깔거리는 것을 보고 위험을 즐기는 그 담대함이 결국 머나먼 미국과 남반구의 이곳까지 그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뉴프런티어라는 서양문화의 정신적 토양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물론 우리 일행은 아무도 타지 않았다. 그곳을 내려오며 간단하게 쇠줄로 만들어 비용도 들지 않을 것 같은 그 공중그네를 우리 고장에도 도입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이심전심으로 군청의 과장 한 분도 같은 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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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혁



이어 '양쇼'를 구경했다. 뉴질랜드에서 사는 모든 양들의 종류를 피라밋 형태의 쇼장에 세워놓고 양털 깎기를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양털 깎기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수북했던 털이 금세 깎이어 맨 살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새끼 꼬기, 제기차기, 연놀이 등 우리 고유의 문화를 패키지로 묶어 국제관광상품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고, 그런 견지에서 내부적인 지역관광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그 지방의 토속적인 것들을 세밀하게 발굴하여 활용하는 방안도 있을 듯 싶었다.

마오리전사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 마셨다는 Paradise Valley Springs는 솔직히 흔한 모양이었지만 8개의 방으로 구성된 온천은 유황냄새가 가득하고 온도가 높아 신뢰할만한 곳이었다. 뜨끈거리는 방부터 찬물에 이르는 8개의 방을 순서대로 돌며 세계의 인종들과 어울리다보니 정해진 1시간은 훌쩍 가버렸다. 그 안에서 연신 키스를 해대며 사랑을 나누던 서양 청춘들의 모습이 지금까지 눈에 선하다.

Rotorua에서 묵었다. 호텔 방의 화장실에는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지 우리말로 사용법이 씌어 있었다. 국력이 신장된 것인가, 아니면 과소비의 단면인가.

7월 21일

아침 일찍 일어나 엄청나게 큰 나무들이 가득한 Red Wood 숲길을 20분 가량 산책했다. 겨울비가 많은 이곳에 단 한 번의 비도 맞지 않고 여행하는 것은 행운이란다. 비가 오면 걸을 수 없다는 숲길을 나와 흰 유황연기를 뿜어내며 땅이 끓어 솟구치는 공원의 따끈거리는 돌 위에 앉아 이국의 풍물을 바라보다가 '연가'의 발상지 로토루아의 호수로 향했다. 맑고 푸른 물이 넘실대는 그곳에는 녹색의 섬 하나가 둥두렷이 떠 있었다. 섬에 사는 총각과 육지에 사는 처녀의 애절한 사랑이 담겨있는 노래가 연가였다. 통기타 가수가 불러 유명한 70년대의 노래 연가.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한국전에 참여했던 뉴질랜드 군인들이 향수를 이기려 부르던 노래를 기억한 사람들이 그들의 뇌리 안에 담긴 뉴질랜드 군인들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불렀고, 이를 전해들은 누군가의 채보를 통해 우리 노래처럼 애창되었던 연가.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빠르지만 그들의 노래는 느릿느릿 처연하다. 열흘이 되지 않아 익숙한 집이 그리워지는 나. 물 설고 낯선 이국 땅의 전쟁터에서 슬프도록 느리게 불려졌을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르며 죽어갔을 병사를 생각하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우리 일행은 잠시 겸허한 마음으로 심신을 추스르고 로토루아 호숫가에서 우리를 위해 숨져간 이름 모를 병사들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연가를 불렀다. 아마 우리가 불렀던 노래는 호수를 지나 섬을 휘돌았을 것이며 근처를 배회하던 병사들의 영혼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생선을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점심을 한국식당에서 해물탕으로 먹었다. 점심 후 땅속에서 뜨거운 가스를 이용하여 발전을 하는 지열발전소를 둘러 봤다. 곳곳에서 솟구치는 흰 색 가스도 이채로운 풍물이었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전하기 위해 가스관을 땅 밑으로 매몰하지 않고 땅 위로 길게 연결시킨 모습에서 이 나라 사람들의 자연친화적 삶을 볼 수 있었다. 뉴질랜드인들은 개발이 필요한 경우에도 원형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놓는다고 한다. 곳곳에 그런 흔적들이 선연하다. 이어진 투어의 옥빛 물결이 기차처럼 넘실대는 후카 폭포와 만년설이 뚜렷이 보이던 타우포 호수의 맑고 투명한 모습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타우포 번지(Taupo Bungy)를 방문했다. 47미터 높이라는 점프대에서 내려다 본 옥빛 강물은 강한 공포심을 유발했다. 무서워 한 발짝도 떼기 어려웠다. 얼른 그곳을 빠져 나와 점프대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으니 3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뛰어 내렸다. 아이구, 실제로 보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출렁거리는 고무줄과 몇 번인가 솟구치고 가라앉는 줄의 추임새를 보노라니 참으로 아찔하다. 우리 일행 중에도 씩씩한 사람이 있어 점프를 했다. 우리 돈 6만원인가(?)를 지불하고 각서까지 쓰면서까지 뛰어내리는 그 씩씩한 도전정신이 참으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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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혁


돌아오는 차안에서 가이드 최 선생이 번지점프에 얽힌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얼마 전 할머니 여행객들을 모셨다고 한다. 공항에서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단촐하게 배낭 하나만을 맨 할머니가 맨 먼저 나와 알은 체를 하시더란다. 그러면서 대뜸 자신은 번지점프를 하러 왔다고 했다. 최 선생은 그때까지만 해도 눈여겨보지 않고 인사말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할머니. 이곳까지 오셨으니 번지점프를 하셔야지요"

이튿날 아침 차안에서 그 할머니가 유쾌한 목소리로 "오늘 한국에는 비가 많이 오니 며느리들에게 전화하여 빨래를 잘 잘 간수하도록 이르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아시느냐고 묻자 그 할머니 곧바로 대답하셨다.

"노트북을 가져 왔어. 인터넷에 연결하여 한국뉴스를 들었지 뭘 이 사람아."

드디어 타우포번지에 도착했다. 이 할머니 정말로 번지를 하시겠다는 거였다. 최 선생이 황당할 수밖에. 68세의 노인이 번지점프를 하시겠다니. 내 귀에도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기어이 뛰어 내리겠다는 할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최 선생이 가만 꾀를 냈다.

"할머니, 실은 이 번지점프는 60세 이상은 안 된다는 규정이 있어요. 포기하세요"

"뭐? 이 사람아. 저 영감은 뭐야."

최 선생의 말이 있고 나서 바로 60이 훨씬 넘어 보이는 서양 할아버지가 뛰어 내린 것이고 이를 목격한 할머니가 대뜸 반격하신 거였다.

사색이 된 최 선생을 물리치고 그 할머니는 정말로 뛰어 내리셨다. 그 용감한 할머니가 내게 먼 친척인지도 모른다. 나와 성이 같으니까. 씩씩하게 뛰어 내리신 할머니가 한참 있은 후 사색이 되어 올라 오셨다. 뛰어 내릴 때의 공포감으로 후회도 되었을 뿐 아니라 입을 벌린 틈으로 소중한 '틀니'가 빠져버린 것이었다. "아"외마디 소리를 칠 수밖에 없었고 이때 입이 벌어졌으며 그 틈에 틀니가 빠져 깊은 강물 속으로 "풍덩"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쾌활하시던 할머니가 의기소침하시자 다른 이들도 함께 침울해져 여행은 엉망이 되었다. 특히 그 할머니가 식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최 선생이 가는 곳마다 죽을 끓여 드리거나 보온병에 식사를 담아 다니며 모셨다고 했다. 여행이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어느 날 E-Mail을 보내 왔단다.

"최 선생, 나, 틀니 했어. 여행할 때 나 때문에 너무 수고 많이 했어. 정말 고마워."

이후로도 매 주 1∼2통의 메일을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최 선생은

" 그런데 어느 주인가 메일이 안 오는 거예요. 노인께 무슨 일이 있으신 지 걱정을 했는데 그 다음 주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올인'의 제주도 촬영장을 몰래 다녀오셨다는 거예요. 내참. 그래서 아들에게 혼났다는 말씀을 듣고 박장대소를 했습니다"라며 그 뒷 얘기까지 이어 주었다.

얼마나 씩씩하고 귀여운(?) 할머니이신가. 어느 등산 길, 내 아내도 갈 수 있다는 영광 불갑산의 벼랑길을 무서워 가지 못했던 나를 생각하며 그 할머니의 용기가 한없이 부러울 수밖에.

그 날 오후 마오리 민속촌을 둘러보고 저녁은 호텔에서 마오리족의 전통식을 먹으며 연가의 느린 곡조인 포카레카레와 춤사위가 현란하게 얽힌 민속춤을 관람했다.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해 과장되게 취하는 제스춰와 큰 목소리는 사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내보이는 원시적 시위가 아닌가. 과거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이나 모두 그 같은 물리적 위력행사가 있었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최근까지 그런 행태를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개화가 늦었던 때문으로 이해가 되었다. 민속춤이 끝난 후 마오리족과 유명한 코 인사를 나눴다.

7월 22일

여행의 마지막 아침식사를 호텔에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동백 한 그루가 호텔 벽에 기대 빨간 꽃을 피우고 있었다. 기후조건이 다름에도 뉴질랜드에는 여기저기 동백이 피어 있었다. 외로이 핀 그 동백을 보며 지난 봄 빨간 꽃을 피웠던 내 아파트 베란다의 동백이 떠오르고 아침마다 꽃나무에 물을 주시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행도 막바지. 몸도 조금은 지쳐갈 무렵이 아닌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잠시 가족의 의미를 생각했다.

마지막 여행지로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반딧불 동굴(Grow worm Cave)을 보았다. 컴컴한 동굴 안에 마치 은하수와 같은 불빛이 어른거렸다. 곤충이 내는 불빛이었다. 가는 국숫발 같은 몸으로 살다가 날아가다 붙는 다른 곤충을 잡아먹고 6∼9개월 간 가만히 희미한 형광등 불빛을 발하고 성충이 된다고 한다. 동굴 안에는 물이 흐르고 그 물 위에 배를 띄워 은하수와 같이 흐르는 불빛을 보는 사이 어느 덧 동굴 밖으로 빠져 나왔다.

점심을 먹고 오클랜드로 돌아 왔다. 시간이 남아 전쟁기념관 앞 넓은 잔디 축구장에서 일행은 두 편으로 나뉘어 축구경기를 했다. 74세의 할아버지 운전기사 Deny는 그런 우리를 보고 한국 대표선수들이냐며 웃는다. 한국식당에서 민물장어와 삼겹살로 배를 채운 뒤 20:50 KAL기를 타고 오클랜드 공항을 출발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아쉽지만 그렇게 여행은 끝났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내 아내와 함께 오리라. 그리고 만년설에 뒤덮여 있다는 남 섬도 반드시 구경하리라. 오, 뉴질랜드여,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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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혁



호주와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대해

주마간산의 여행이었지만 여행기간 동안 또 이 여행기를 쓰는 내내 두 나라에 대해 생각했다. 개국 200년의 역사에서 어떻게 부를 일궈냈을까.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 두 나라는 어떤 문화의 나라인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모든 것이 원칙주의와 열린 마음에 귀결된다고 나름대로 조심스레 판단해 보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 것을 개방으로 극복했다는 가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나라 모두 적절하게 이민을 받아들여 인구를 키웠으며 이민자들의 돈으로 경제적 위기를 돌파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자기들의 문화에 동화시켜 흔들림 없이 국기를 다져왔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하드래도 백호주의를 버리고 아시아를 향해 손짓한 호주의 개방정책과 마오리를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지금까지 그들을 우대하는 뉴질랜드의 정책은 적어도 국민들의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 것 같다.

또 하나는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우직하게 지켜내는 일치된 국민성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 74세의 운전기사 데니는 아침의 추운 날씨로 히터를 켜달라는 우리들의 요구를 1시간 이상 묵살했다.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엔진 온도가 20°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차에 무리가 오므로 20°가 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그의 설명에 우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것이 옳은 지의 여부는 남겨 놓기로 하자.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끝까지 원칙을 지킨다는 이유로 20°에 이르고서야 난방을 하기는 솔직히 어려운 일이다. 일례이긴 하지만 이런 원칙주의는 사회전반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면도 느꼈다. 이 두 나라가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대표적인 국가로서 남자들에게 가정에의 의무적인 충실을 강요하고 이혼할 경우에도 여성에게 월등히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으며, 병원, 육아, 실업수당 등의 사회안전망(Social Security)이 크게 발전하여 살기 좋은 나라라고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인간의 게으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아름다운 제도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빈자에의 조건 없는 지원과는 다르지 않는가.

모두에서 밝힌 대로 짧은 여행으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마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의 사람이 사물의 핵심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넓은 해량을 구하고 싶다.

면세점 小考

솔직히 국내여행도 제 때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국외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주위 동료와 친지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사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위 면세점이라는 곳을 들르게 된다. 그 나라를 떠나는 마지막 날, 코 큰 사람이 운영하는 점잖은 면세점에 들러 많은 직원들이 선물을 샀다. 이제 귀국해야한다는 중압감이 다소 무리하게 선물 구입을 부채질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인 종업원이 있는 그 가게의 판매가격이 공항면세점보다 비싸다는 거였다. 당초 어느 곳보다 싸다는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에 가게를 들어갔고 대부분의 직원들이 이미 쇼핑을 끝낸 상태에서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이를 발견한 것이다.

많지는 않은 액수였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솔직히 큰 비애를 느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옳지 않은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끝까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일생에 한 두 번의 기회를 통해 외국을 어렵게 오가는 이들을 위해 보다 따뜻한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 아울러 해외를 나가는 여행객들도 세계를 휩쓰는 우리 물건의 우수성에 자신감을 갖고 나라 경제를 위해서도 자중자애의 슬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여행기를 마무리지으며(내 어머니의 흐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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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혁


비행기에서 1박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7월 23일 오후였다. 집으로 들어서니 아내가 먼저 맞으며 어머니에게 내가 온 사실을 알렸다. 방안에서 그 소리를 듣고 버선발로 달려나오신 올해 87세의 내 어머니, 내 손을 잡으며 흐느끼셨다. 우리 집 대주(大主) 왔냐아. 얼마나 고생했냐아... 어머니의 그 모습에서 다시 한번 어머니의 내게 대한 한없는 사랑을 느꼈다.

어머니는 몇 년 전 어깨뼈가 부서져 병원신세를 지셨다. 그것이 생각나 호주에서 뼈 재생과 골다공증에 좋다는 설명을 듣고 사온 심해상어연골을 어머니와 아내에게 한 상자 씩 공평하게 건넸더니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던 어머니가 또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한결 아빠야, 이 것 느그 동생 반만 주면 안되끄나?

하는 일이 여의치 못해 힘들어하는 막내아들을 그 순간에도 잊지 않으시고 계신 어머니. 영광 댁, 정 여사님, 내 어머니. 어찌 어머니의 큰사랑을 덮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집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내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은 처음으로 돌아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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