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과연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08.05 09:06수정 2003.08.0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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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하는 일중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은 빨래하는 것이다, ‘세탁기에 빨래 감을 넣고 돌리면 되는데 무슨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빨래를 세탁기가 다 알아서 해주는 것은 아니다.


여름이면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나와 애들이 빨래 감을 마구 쏟아낸다. 또 장마철이라 밖에 내다 말릴 수도 없고, 아내가 빨래하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다. 웬 옷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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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가딘

옷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나는 아내와 결혼 한 후 서너 벌의 양복을 샀다. 이것저것 얻어온 옷도 있다. 아마 더 이상 돈을 주고 옷을 살 경우는 없을 듯 하다. 이미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옷으로 죽을 때까지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이었다. 그 시기가 60년대였으니 모두가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때였다. 그러니 옷은 나중 문제였다. 셔츠 소매 끝은 때가 반질반질하고, 바지도 여기저기 기워 입었고 양말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한겨울에도 내복이라는 것을 입어보지 못했고, 심지어 속옷도 없었다.

여름 더위야 벗고 지내면 되지만 한겨울 혹한은 견디기 어려웠다. 어느 날, 어머니와 우리 사남매가 다니던 교회에 어느 선교단체의 주선으로 구호물자가 도착했는데, 교인들의 필요에 따라 그걸 나누어 준다고 했다. 구호물자의 대부분은 옷이었다. 어머니가 교회에서 받아오셨다며 옷 보따리를 내려놓으셨다,

우리 형제들은 와락 달려들어 자기 몸에 맞을 만한 옷을 골라 몸에 걸치고는 거울 앞에서 좋아했다. 나에게는 겨울 코트가 주어졌다. 표범무늬처럼 까만 점박이가 있는 두툼한 코트였다. 그걸 입고 집 마당에 나가 섰더니, 얼마나 따뜻하고 감촉이 좋았는지 그 귀한 선물을 보내준 미국이라는 나라에 감사기도를 올렸다.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내일 이 옷을 입고 가면 친구들이 뭐라고 할까?’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내가 미제 털 코트를 입고 학교에 등장하면 같은 반 여자아이들이 모두 놀라워 할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 아침, 아침밥을 먹고 일찌감치 서둘러서 학교엘 갔다.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미제 털 코트를 입고 운동장으로 나와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친구들이 나를 발견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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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가딘

아이들이 하나둘 학교 교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미제 털 코트를 입고 서 있는데도 아이들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다시 교실로 들어왔다. 학교 수업이 시작되었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복도를 나가자, 그제서야 아이들이 내가 미제 털 코트를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듯 했다. 잠시 후에 아이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더니 내게 묻는다.


“야, 너 이 옷 어디서 났냐?”
“응, 우리 엄마가 교회에서 얻어왔어.”

그런데 아이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 때 어떤 여자애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야, 네가 입은 옷 여자 옷이잖아. 단추 구멍이 오른쪽에 난 걸 보니 틀림없이 여자 옷이야!”

일순간 아이들이 크게 웃는다. ‘여자 옷이 절대 아니라’고 항변할 수 없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심한 모멸감이 몰려왔다. 나도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어머니가 남자 옷이라고 해서 남자 옷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때처럼 창피했던 때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집은 화천읍내로 이사 왔을 때였다.

나는 더 이상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내처 달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는 왜 이 옷이 남자 옷이라고 속여서 나를 골탕 먹였어요? 창피해서 어떻게 학교를 가요?”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그 다음 기억은 잘 생각나질 않는다. 다시 학교에 간 것 같기도 하고, 안 간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한 기억이 없다.

사람은 인격(人格) 이라는 옷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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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사람은 누구나 옷을 입는다. 계절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는다. 직업에 따라 옷의 종류도 다르다. 신부는 혼례를 치르기 위해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농부는 작업복을 입고 씩씩하게 일터로 나간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군무에 임한다. 성직자는 예배를 집례하기 위하여 예복을 입고 강단에 선다.

옷을 잘 입어야 한다. 외관(外冠)을 잘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길거리에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농부가 신사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일터로 나갈 수 있는가? 신부가 허름한 몸빼를 입고 예식장에서 들어설 수 있는가?

옷은 옷 나름대로의 특징과 쓰임새가 있다. 수영장에 갈 때 입어야 할 옷이 있고, 등산이나 낚시를 하러 갈 때 입어야 할 옷이 있다. 심지어 죽은 사람 입는 옷도 따로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옷도 잘 입어야 하지만, 옷을 입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 외관만 근사하게 갖추었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반대로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그 사람을 천대하거나 허투루 대해서도 안 된다. 지금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옷에는 눈에 보이는 옷과 보이지 않는 옷도 있다. 눈에 보이는 옷도 잘 입어야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옷도 잘 입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란 어떤 옷인가?

인격(人格)이라는 옷이다. 인격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이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입었어도 그 사람은 가치가 없다. 그러나 단돈 만 원 짜리 허름한 옷을 입었어도 인간 됨됨이를 제대로 갖추었으면 그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이다.

1960년대 중반, 나는 미국에서 구호물자로 보내준 여자 털 코트를 입고 학교에 가서 아이들이 나를 근사한 사람으로 봐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실패하고 말았다. 미제 여자 털 코트가 나의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또 하나의 단추이기도 하지만, 나의 삶을 성숙한 길로 인도하는 소중한 깨달음을 주는 흔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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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나무도 철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여름 한복판, 산에는 초록이 우거져 있다. 향기로운 바람이 코끝에 전해진다. 나무도 철따라 자기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는데 하물며 인간은 말해 무엇하나.

지금 나는 과연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인가?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 쓴 소나무, 그 아래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한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이 지표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건목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 친다
(황지우 詩. 소나무에 대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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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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