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겨울 대학로에서 후배 만화가인 강도영, 정재훈과 자리를 함께 한 이희재(맨 왼쪽).오마이뉴스 홍성식
게오르그 루카치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리얼리즘 논쟁'에 대해 고민하고, 뤼시엥 골드만의 저서를 읽었으며,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를 앞에두고 심각해져본 경험이 있는 세대에게 사실주의(리얼리즘)란 문학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었다.
현단계 세계에 대한 사실적인 진단과 그에 대한 전망을 찾을 수 있는 현실에 착종한 문학. 고리끼의 <어머니>에서는 바로 이 리얼리즘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기에 80년대 청년들은 이 소설을 기독교인이 성서(聖書) 아끼 듯 사랑했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문학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자는 그 사실을 만화가 이희재(51)의 <악동이>와 <간판스타>를 통해 깨달았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인한 농촌의 붕괴와 악순환 되는 도시빈민의 곤궁,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뿌리깊은 슬픔과 그 슬픔의 힘으로 단련된 좋은 세상을 향한 빈자(貧者)의 몸부림이 녹아있는 이희재의 만화들은 필경 '만화를 넘어서는 만화'인 동시에 고리끼와는 또다른 '리얼리즘의 승리'였음에 분명하다.
그 자신이 육지가 가물가물 보이는 남도의 땅끝 섬에서 태어났고, 중학생이 돼서야 버스를 본 '가난했던 사람' 이희재. 그는 같은 시대를 서럽고 아프게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가없는 애정을 지녔다. 그 애정이 만화에서 표현됨은 물론이고 가끔은 현실에서도 발휘되는데, 주로 후배들과의 술자리를 통해서다.
대략 2년 전쯤이던가. 인터뷰를 통해 알게된 이희재와 대학로로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만화를 그리는 후배 3~4명과 함께였다.
연극이 끝나고 당연한 수순처럼 인근 삼겹살집에 몰려가 부어라 마셔라 술추렴을 했다. 서로의 감상평을 나누고, 늦가을 싸늘한 날씨를 눅인다는 핑계로 마련된 주석.
그 자리에서 기자는 보았다. 소주를 한 잔도 마시지 못하면서 새벽 2시까지 계속된 술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후배들의 농담에 웃어주고, 시시콜콜한 의문에 친절히 답해주는 이희재의 미소를. 행여 주머니가 넉넉찮은 후배들이 술값을 치를까봐 서둘러 신발을 꿰고 계산을 마친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술도 못 드시면서 왜 이렇게 늦게까지 있는 겁니까? 재미도 없을텐데." 돌아온 대답이 과연 리얼리스트 이희재다웠다.
"아, 술이야 못 마셔도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만화 소재도 찾고 그러는 거지 뭐." 말을 마친 그가 소탈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다. 그는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소재를 찾고,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의 말과 몸짓을 더하거나 빼지않고 만화로 옮겼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훈훈한 리얼리즘의 이유가 자연스레 감지되는 순간이었다.
궁핍한 시절을 겪은 자신의 체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술 취한 사람의 넋두리까지 웃으며 들어줄 수 있는 여유. 이희재 만화의 힘은 바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닐지.
지난해 겨울, 다시 한번 대학로 거리에서 이희재를 만났다. 그는 아들 또래의 젊은 만화가들과 함께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고, 미국의 오만을 질타하는 <미(尾)친 만화전>을 벌이고 있었다.
'비록 힘겨울지라도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겠다'는 그의 말이 다시 한번 떠올라, 추운 날씨임에도 가슴만은 후끈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가 세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놓치지 않는 한, 쉰 한 살의 늙은(?) 리얼리스트 이희재는 물론, 그가 창조한 캐릭터 '악동이' 또한 여전히 건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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