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자유인', 김정환

취재수첩 속 사람들 2

등록 2003.07.01 20:08수정 2003.07.0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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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문화분야 취재 역시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절반이다. 아직은 순수와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예술가들이고 보니 취재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 이 기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대작(對酌)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 문화계에 대한 기자의 인상기다...편집자 주

a 지난 겨울 어느 날 새벽 인사동 거리에 선 김정환 시인.

지난 겨울 어느 날 새벽 인사동 거리에 선 김정환 시인. ⓒ 홍성식

무엇이 있어 자유로운 그의 정신을 가둘 수 있을까? 시와 소설, 클래식음악 평론과 공연연출, 온·오프라인 교육사업과 역사서 집필까지를 사통팔달(四通八達)하는 '멀티 인간' 김정환(50). 학창시절 시를 가르치던 조태일(99년 타계)에게서 전해들은 김정환의 전설(?)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겨우 스물 한 살 어린 나이에 유신을 반대하는 시를 써 그 시절 투사들의 정규코스인 징역과 강제징집을 거쳐, 채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쟁쟁한 민주인사의 반열에 오른 사람.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에 70권이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쓴 사람. 소주 건 맥주 건 2박3일을 마시고도 술을 탓하며 할 일을 미루지 않는 사람.

거기다 직접 읽은 그의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와 <기차에 대하여>가 던져준 충격은 더 말해 무엇하랴.

김정환이 쟁쟁한 민주인사의 반열에 올랐던 나이인 서른. 똑 같은 나이 서른에 기자는 정말이지 별 볼 일 없이 겨우겨우 제 입에 들어갈 밥술이나 챙기고 있던 직장생활 초년병이었다.

바로 그 서른 살의 여름. 골뱅이와 계란말이를 안주로 파는 광화문 한 대포집에서 처음으로 김정환을 만났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에 품었던 외경과 경외를 버렸고, 그의 표현대로라면 '착한 술친구'가 됐다. 스타와 팬의 만남이 어떻게 그렇게 역전될 수 있었냐고?

터무니없이 불의했던 시대가 부풀린 전설은 새벽까지 이어진 몇 번의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앞에 무력하게 붕괴됐다. 김정환은 해방에 대한 신념과 전투적 공격성만으로 뭉친 무시무시한 전사(戰士)가 아니라, 엘비스 프레슬리를 흥얼거리고, 새까만 후배에게도 웃으며 잔을 권하는 다정다감한 아저씨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세간에 떠도는 전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는 실제로 문학과 사회과학, 음악과 역사를 넘나드는 100여권의 저서를 낸 사람이고, 계엄령 위반으로 2년의 실형을 살았던 빵잽이며, 두주불사(斗酒不辭)를 자랑하는 천하의 술꾼이다. 게다가 일년 내내 똑 같은 셔츠만 입고, 아들의 낡은 슬리퍼를 외출용 신발로 사용하는 기인(奇人)이기도 하다.


시대가 만들어낸 '전설'과 자처한 '기행'의 저변에는 무엇이 깔려있을까라는 궁금증은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증폭됐다. 그리고, 마침내 얻은 내 나름의 해답.

"전설과 기행의 밑바닥에는 김정환의 자유로운 정신이 있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에게 세상과 인간을 옭아매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폭압이 곱게 보였을 리 없고, 철저히 장르 구분을 하는 문단의 경직성이 기꺼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술을 많이 마시면 몹쓸 병에 걸려 빨리 죽는다'는 의사들의 협박도 '음주의 자유권'을 박탈하는 속박으로 보였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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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출판사

사회가 강요하는 어떤 규제에서도 자유로운 김정환. 그의 자유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속에 방종의 치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선량한 자유. 그런 까닭에 김정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매양 꼭 같은 입성과 맨발에 신은 슬리퍼를 함부로 타박하지 않는다.

최근 한 권의 두께가 어지간한 사전에 육박하는 김정환의 역사서 <한국사 오디세이>(바다출판사·전2권)가 출간됐다. 97년 출간된 <상상하는 한국사>의 개정판이다.

그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해석을 통해 고려를 '아름다움과 포르노그래피가 병존했던 시대'로, 조선을 '삶과 분리된 정치학이 실패한 시절'로 정의했다. 어째서 그런 정의를 내렸는지 오늘 밤 술자리의 자유스러움을 빌어 물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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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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