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봄 인사동에서의 김지하 시인.홍성식
자그마치 34년이란 긴 세월. 그럼에도 '황톳길'이란 절창을 잊을 수 없는 게 비단 기자만일까? 무소 불위의 독재자 박정희가 통치하던 암흑의 시절. 1969년 <시인>지(誌)를 통해 발표된 김지하 '황톳길'은 가슴 가득 울화와 침통을 담고 살던 청춘들의 주먹을 떨리게 만들었고,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비단 '황톳길'뿐이랴. 접신(接神)한 듯 써 내려간 담시 '오적(五賊)'과 그 자체로 뜨거운 노래가 된 '타는 목마름으로'가 던져준 감동은 어떠했으며, 그가 일신의 영달과 목숨을 담보하여 뛰어들었던 굴욕적 항일외교 반대투쟁과 반독재 반유신투쟁은 또 어떠했던가.
뻔히 감옥에 갈 줄 알면서도 당당하게 옥중기 <고행 1974>를 동아일보에 실었던 두둑한 배짱의 청년 김지하. 이십대와 삼십대, 그는 '공포의 이름' 박정희에 맞서는 문화예술계의 상징적인 대항마였다.
그를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2001년 가을이 깊어가던 명지대학교의 한 강의실에서였다. 주룩주룩 비는 내리고 김지하의 특강은 겨우 학생 20여명을 놓고 진행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면 북새통을 이루던 70년대의 강연회 풍경과는 거리가 먼 쓸쓸함. 세월이, 시간이 사람들을 이렇게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김지하의 얼굴도 그랬다. 거기에는 머리를 삭발한 채 오른손을 휘두르며 기자회견을 주도하던 호방함도, 불의한 권력이 장악한 법정의 오랏줄에 묶였지만 눈빛만은 불 맞은 들짐승의 그것처럼 휘번득거렸던 담대함도 담겨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