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침묵의 언어다

에드워드 홀의 <침묵의 언어>

등록 2003.08.12 08:04수정 2003.08.1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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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새로운 밀레니엄과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인구에 회자된 화두 중의 하나는 바로 ‘문화’였다. 정부에서도 광화문에 있는 문화관광부 청사에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는 커다란 현판과 함께 2000년까지 남은 일자를 카운트 다운하는 전광판을 설치하여, ‘문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3년이 더 지난 지금, 아직 ‘문화’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의 삶과 사회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여전히 ‘경제’임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문화산업’, ‘문화상품’, ‘문화경쟁력’ 등 ‘문화’를 접두어로 하는 문화관련 용어에서조차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경제’이며, ‘문화’라는 가면으로 어설프게 위장한 ‘자본주의’의 얼굴이다.


개념적 함의로 따지자면 분명 ‘문화’가 ‘경제’를 포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제’에 의해서 ‘문화’를 바라보고 정의하려는 이 전도된 시각은 분명 물질만능주의에 오염된 우리의 왜곡된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문화’라는 것을 단지 고고학이나 인류학의 연구대상으로만 여기는, 그래서 우리의 일상적 삶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편견과 ‘문화’란 뭔가 보다 고차원적이고 보다 높은 지적 수준과 교양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무지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에드워드 홀의 <침묵의 언어>는 ‘문화’에 대한 이러한 편견과 무지가 말 그대로 편견이며 무지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는 수천년 전에 매몰된 유적의 발굴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문화’를 우리 일상생활의 한복판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문화’를 고고학으로부터 구출해낸다. 또한 현존하는 소수 부족 사회에 대한 현장조사로 한정지었던 ‘문화’의 연구 영역을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 이곳에서의 삶에 대한 연구로 확대함으로써 ‘문화’를 인류학으로부터도 구출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문화’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수단이며 더 나아가 인간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으며, 단지 고고학이나 인류학의 연구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문화학’으로 자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주고 있다.

그의 문화학의 첫 번째 전제는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전제는 고도의 정보ㆍ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10가지 기본적 의사전달체계(PMS : Primary Message Systems)로 의사소통 활동을 구분하고, 이러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범주를 공식적, 비공식적, 기술적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한 것은 상당히 새롭고도 설득력이 있으며 ‘문화’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제공해주고 있어 인상적이다.

여기에 그는 커뮤니케이션의 메시지(문화적 의미)를 개별체, 고립요소, 양식이라는 세 요소로 구분함으로써 문화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분류하고 비교할 수 있는 분석적 틀도 마련해주고 있다.


그의 문화학의 두 번째 전제는 ‘문화는 생물학적 활동에 근거한 생물근원적(bio-basic)인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적 행동은 생물학적인 기반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의 대표적인 것으로 그는 ‘영토권’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두 번째 전제에 의해서 그의 문화학은 고고학이나 인류학과 연결되며 또한 생리학이나 생물학과 만나게 된다.

이 두 가지 전제 하에서 에드워드 홀은 <침묵의 언어>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의 삶을 이루는 두 가지 축이 문화적 차이에 의해서 어떻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풍부한 사례로써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페인이나 멕시코 등 라틴계 국가에서 처음 일하게 되는 미국인은 종종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하여 분통을 터뜨리곤 하는데, 그것은 라틴계 사람들은 미국식의 계획되고 꽉 짜여진 시간 체계와는 달리 느슨하고 융통성 있는 시간 체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문화적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공간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방식도 문화권마다 달라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대화를 나눌 때 편안하게 느끼는 거리가 라틴계 국가에서는 미국보다 훨씬 가깝다는 사실이다.

라틴계 국가의 사람들은 미국인의 경우라면 성적인 감정이나 적대감이 유발될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으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인과 대화할 때 그들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반면에 미국인들은 뒤로 물러선다. 그 결과 그들은 미국인들을 멀고 냉담하며 뒤로 빼고 불친절하다고 오해하고 미국인들은 그들이 목에 입김을 내뿜고, 밀고, 얼굴에 침을 튀긴다고 늘 비난한다.

에드워드 홀은 누구인가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로 1942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나바호족, 호피족, 에스파냐계 미국인, 남태평양의 트루크족 등과 더불어 현지조사연구를 행했다.

그후 해외원조사업이 집중적으로 행해진 1950년대에 미국 국무부의 의뢰로 '해외파견요원 훈련사업'에서 수년간 책임자를 맡았으며 1959~63년까지는 '워싱턴 정신의 학교'에서 커무니케이션 연구 프로젝트를 지도했다.

그는 덴버 대학 인류학과 주임교수, 베닝턴 칼리지 교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 일리노이 공과대학 프록세믹스 리서치센터 소장, 노스웨스턴 대학 교수를 지냈다. 또한 '미국인류학협회'와 '응용인류학회'의 특별회원이며 '국립과학아카데미 건축연구자문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했다.

통문화적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뛰어난 업적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홀은 수 많은 기업과 정부기관의 컨설턴트로 활약하였으며 지금은 뉴멕시코 주의 산타페에서 집필과 연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침묵의 언어>(1959), <숨겨진 차원>(1966), <문화를 넘어서>(1976), <생명의 춤>(1983)은 상호연관성을 지닌 연작으로 문화인류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사회심리학, 교육학, 역사학, 행동과학, 동물학, 유전학 등 초학문분야적 접근방식이 원용된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에드워드 홀은 <침묵의 언어>에서 문화권마다 차이가 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오해와 갈등이 생기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은 지각되지 않는 침묵의 언어이지만 겉으로 드러난 말이 숨기고 있는 진실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며, 그 진실은 다른 문화체계에서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가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 삶에 깃든 수천 수만의 침묵의 언어를 발화시킴으로써 침묵의 속박으로부터 문화를 해방시키고, 동시에 그 발성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로부터 문화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다.

에드워드 홀의 <침묵의 언어>는 바로 이러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1 : 침묵의 언어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한길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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