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적게 하고도 신의가 통하는 사회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08.14 08:03수정 2003.08.1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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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교동에 나아무개라는 40대 남자가 사람들을 꼬드겨 돈을 갈취하고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피해액이 얼마인지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사기행각을 벌이고 야반도주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교동에서 태어나서 여기서 그 나이 먹도록 자라난 사람이었다.


이 사람 별명이 '뻥쟁이'였다. 허풍이 센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게 돈을 뜯겨 피해를 본 사람들 중에 정말 딱한 사람들이 많다. 주로 어수룩하고 착한 노인들이 많이 당했다.

한동안 교동이 살벌했다. 돈이 당장 필요해서 이웃집에 만 원도 빌려 달라 말하기가 꺼림직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랭했다. 한 사람이 사람들의 신의를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우리 교회 교인 가정도 두 가정이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사람이 말을 얼마나 잘 했던지 동네 사람들이 그 말에 놀아난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믿을 수 없는 허풍쟁이일 것이다. 허풍쟁이는 무엇이든 약속을 하지만 지키는 약속은 하나도 없는 법이다. 서로 마음을 다지고 주고받는 것이 약속이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남의 마음을 받아서 떠보기만 하고 헌신짝처럼 남의 마음을 버리는 사람이다. 남의 마음을 업수이 여기는 짓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짓은 없다. 그러한 짓이 바로 미움을 싹트게 하는 온상인 까닭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주 예쁘고 다소곳한 처녀가 하나 있었다. 그 처녀에게 마음을 두고 그 고을 허다한 총각들이 서로 몰래 짝사랑을 퍼붓고 있었다. 중신아비들이 처녀 집을 들락거리며 신랑감을 소개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는 것이다.

얼굴이 잘생긴 총각은 얼굴값을 믿고 촐랑거리고, 집안이 좋다는 총각은 제 집안 뼈대만 믿고 거드름을 피우고, 학문을 해서 아는 것이 많다고 고개를 드는 총각들은 모두 퇴짜를 맞았다. 그래서 부아가 난 중신아비가 처녀 애비에게 딸을 처녀귀신이 되게 할 작정이냐고 역정을 냈더니, 그 애비는 중신아비의 손을 잡고 그대가 천거하는 총각들은, 모두 제 속을 믿는 놈들이 아니고 얼굴을 믿고 뼈대를 믿고 학문을 믿고 촐랑대는 난 놈들에 불과하다고 타일러 주었다는 것이다.


본래 난 놈들은 믿을 수가 없어 잡놈이 되기가 쉽고 잡놈에게 잡힌 아낙은 평생을 눈물로 살아야 하니 어느 애비가 난 놈에게 딸을 주겠느냐고 면박을 주었다는 것이다. 중신아비가 어느 신랑감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든 놈을 찾아보라고 귓속에다 소곤거리면서 내 딸이 엿들을지 모르니 바로 옆집 총각에게 뜸을 들여 달라고 청을 했다는 것이다. 옆집 총각은 못생겼고 무지랭이 농사꾼으로 통했던 모양이다. 어디 하나 볼품 없는 선머슴 같은 놈에게 딸을 주려 하느냐고 중신아비가 물었다.

그러자 처녀 애비가 본래 등잔 밑은 어두운 편이라고 타이르고 '그 총각은 밤이면 책을 읽어 학문을 하고 낮이면 밭을 갈아 열심히 일을 하네. 그가 심은 곡식은 무엇이든 잘되고 그가 기르는 소나 돼지는 항상 살이 찌고 그 가솔들은 항상 행복한 삶을 산다네. 이는 다 그 총각이 뚜벅뚜벅 할 일을 하고 제 분수를 아는 놈이란 말일세. 그러니 든 놈이 아닌가. 든 놈이어야 사람이 되는 법이니 딸을 둔 애비 치고 든든해서 사람이 된 놈을 마다할 것인가. 그러니 옆집 총각이 신랑감으로 안성맞춤이지.'


그래서 중신아비가 다리를 놓아 떠꺼머리 숫총각이 예쁜 신부를 맞이하였더니 그 고을 난 놈들은 상사병만 앓다가 제 풀에 꺾였다는 이야기를 옛날 노인들은 들려주며 집안의 젊은 것들의 바람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제일 아쉽다. 믿을 수 없는 세상일수록 신용이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법이다. 누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일까?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일 게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일 것이다. 얼굴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살기를 품은 인간처럼 잔인한 동물은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말의 인플레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말이 말 같지 않다. 말은 많은데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불신시대라고 한다. 얼마나 믿을 수 없으면 그런 말이 생겨 난 것인가? 말이 많은 사람을 허풍이 세다고 한다.

말이 많으면 반드시 실수하게 되어 있다. 가급적 말을 적게 하는 게 좋다.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세상에서 말을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말로는 모두가 애국자이다. 그런데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가는 걸 본다. 보통 사람들은 작은 죄를 짓고도 카메라에 잡히면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창피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런데 엄청난 뇌물을 받고 쇠고랑을 차고 들어가는 고관대작들은 대도(大盜)답게 의젓하게 들어간다.

어진 사람은 입이 있어도 무겁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남몰래 민첩하게 한다. 남의 귀를 솔깃하게 하려고 말하는 경우가 없고, 해야 할 말만 어렵사리 한다. 남들 보기에는 어눌해서 얼핏 보기엔 어리석어 보일 만큼 말로서 재간을 피울 줄 모르는 어진 마음은 남을 돕고 아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해치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는다. 법 없이 살 사람, 예수 같은 사람, 부처 같은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어디가나 나서지 않는다.

말만 앞세우고 해야 할 일을 밀쳐두는 무리들은 어진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러나 어진 마음은 그런 따위로 신경을 쓰거나 대응할 꾀를 부리지 않는다. 어진 사람은 말 한마디가 곧 삶과 직결되어 있다.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니다. 예수는 그가 말씀하신대로 사셨다. 말과 삶이 하나(一致)였다. 성숙한 사람은 그것이 삶으로 나타난다.

말을 안 하고, 아니면 적게 하고 살 수는 없는가? 자기 말에 책임지는 사회, 말이 없어도 서로에게 믿음을 주는 그런 사회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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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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