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1.4평 짜리 방은 잠버릇이 고약한 어른이라면 좁아서 잘 수도 없을 것 같은 작은 공간이었다. 그 작은 공간에서 그는 예술혼을 태우며 살았고, 한 인간으로서 고민했을 것이다. 그 고민은 정신분열증까지 가져와 거식증을 가져왔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까지 했을 것이다.
무엇을 먹고, 마신다는 것조차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아주 잠시 천재화가 이중섭이 거처하던 방을 보고 돌아왔을 뿐인데 나의 마음은 이곳 저곳 마구 파헤쳐져 있다.
짐승같은 삶을 살면서도 그가 붙잡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 밥벌이도 못하는 놈이 무슨 예술은 예술이라며 주위의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는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가 도저히 같이 살지 못 하겠다고 떠났을 때 그림 그릴 종이도 없어 담배를 감쌌던 은박지에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그림을 그렸던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다가오지가 않는다.
그는 무엇을 보고 살았을까?
이현주 목사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세상에 '절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자에게 있는 것이고, '희망'이라는 게 있다면 역시 희망하고 있는 자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절망이나 희망은 어떤 상황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입니다> 중에서-
| | 화가 이중섭 | | | |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중섭은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유학을 떠난다. 그는 도쿄 문화학원 재학 중 <자유미협전>에 출품하여 '태양상'을 받아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 후 일본 여성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하여 귀국한다. 8·15광복 후 원산에 머문 그는 공산체제 아래에서도 어용적(御用的)인 그림을 그리지 않고 버티다가 6·25 전쟁 때 월남하여 부산, 제주, 통영 등지를 전전하면서 숱한 고난과 슬픔을 겪었다.
이 무렵 그는 부두노동자 생활을 하였고, 생활고에 지친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6년에는 예술에 대한 회의와 인간적인 좌절로 거식(拒食), 거언증(拒言症) 등 정신분열증을 나타내다가 죽었다. / <두산세계대백과 엔사이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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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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