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쓴소리에 기뻐하는 이유

김규항의 'B급 좌파'를 다시 읽는다

등록 2003.08.20 14:12수정 2003.08.2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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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정확한 햇수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겨울.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원래 졸음이 많기도 했고 마침 이르게 불을 넣은 온풍기 바람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강사 선생님은 슬쩍 말을 끊더니 ‘정말 좋다’며 수필 한 편을 소개했다. 사람들이 챙겨야 할 교양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구사대’를 놓고 벌어진 엉뚱한 담화가 주내용이었다. 작가의 이름이 생소해 내용만 기억하고 말았다.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다가 우연히 모자를 눌러쓴 어느 작가의 사진을 봤다. 모자를 눌러 쓴 폼에 작가라는 호칭이라 당연히 ‘칼의 노래’의 김훈씨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짧은 이력을 살펴보니 문학 쪽은 아니다. 이름만 기억했다. 김규항.


두 사건의 연쇄작용으로 나는 'B급 좌파’를 인터넷 서점을 통해 샀다. 배송료를 면제 받는 가격대에 맞추려고 곁다리로 주문했다. 그런데 막상 한 뭉치의 책을 받고 보니 손에 가장 먼저 잡아 든 게 ‘B급 좌파’다. 쉬지 않고 읽었다. 오랜만에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시간을 보냈다. 다 읽고 나서는 작가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반복적인 일상에 지쳐 ‘왜 이런 걸 하고 있나’ 싶을 때면 책을 꺼내 읽고 힘을 낸다. 작가와 함께 세상을 욕하며 살아갈 독을 끌어 올린다. 영화잡지를 통해 새롭게 써 내려간 작가의 칼럼을 읽으며 또 힘을 낸다.

그의 글이 지닌 힘은 거침없음이다. 독설의 대상이 광범위함은 여느 칼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매력이므로 차치하고 그의 화술을 보자. 정식 출판물 치고는 과감한(?) 말버릇이 놀랍다. 점잖은 논객이나 선생들이라면 그런 그의 화술을 두고 천박하다거나 보기 민망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지식인의 이름을 걸고 쓴 글이면서도 ‘개새끼’니 ‘조까’를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예 ‘개새끼들(병역 비리 문제를 다룸)’을 제목으로 채택하기도 한다. 아무리 B급 좌파라지만 위험 수위를 넘어섰지 않나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내용을 차근히 읽고 나면 생각은 달라진다. 작가의 과거사와 맞물려 소개하는 이야기에 동질감을 느끼다가(작가는 편한 길을 마다하고 늦게나마 정식으로 군대에 들어갔고 팔이 잘린 사병의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작가가 제시하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에 수긍(‘권위에 무작정 복종하고 약자에게 불량스러워지는 것이 사람 되는 게’ 아니라면 ‘군대 가서 사내다워진다는 말은 그저 농담’이란다)을 하고 그것에 대한 작가의 판단에 동의(그럼에도 돈을 먹여 군대를 빠지지 말고 가야 하는 까닭은 나 대신 남을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란다)를 하면서 마지막에 비열한 자들을 향해 터뜨리는 한마디 욕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책을 팔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는 비책이라면 단연 으뜸의 상술(책을 팔든 그 안에 담긴 글을 팔든 팔자고 내 놓은 상품을 두고 하는 말이니 ‘상술’을 나쁘게 볼 이유가 없다)이며 독한 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으로써 얌전하고 마냥 점잖은 지식인들이 엄두도 못 낼 신선한 방법을 끌어온 데 부정할 수 없는 글 몰입의 기술로 으뜸이다.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힘은 사실에 있다. 책에서 ‘리얼리즘은 리얼하다’고 말했지만 이 글에는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세상에 독설을 퍼붓는 자로서 쉽게 하지 못할 일이다. 개인의 삶이 세상의 잘못을 비꼬고 비판할 발판으로만 쓰이는 게 아니니 말이다.


누구의 삶에도 잘못이 있고 약한 모습이 있으며 자신이 쓴 글과는 어긋나는 부족한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그 모습을 몰랐으면 모를까 알면 글마저 달리 보인다.

소설이 마냥 아름답고 좋다고 해도 그 작가의 세월 따라 늙은 얼굴에 술을 마시면 당연히 하는 주정까지 마냥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고 그 여파가 여실한 것처럼 말이다. 소설이 그럴진대 칼럼이야 오죽할까.


그럼에도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지난 세월과 현재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유년 시절에 비행장을 전전했다는 이야기며 자식을 키우며 느끼는 작은 감정들, 개신교 신자로서 남들과 다르게 살면서 겪는 일까지 작가만의 특이한 이력을 꿸 수 있다.

그리고 그 앎에서 오는 진실성은 책 속에 담긴 글에 대한 느낌으로 이어진다. 삶과 독설이 진실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이유로 계속 이어지는 독설을 두고도 ‘그래 너는 혼자 고고하게 살아라’ 식의 빈정거림은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독설이 잘난 체가 아니라 생활의 발견임을 아는 탓이다.

연재를 접었던 영화잡지에 작가의 글이 다시 연재되기 시작했다. 한 주 걸러 나오는 그의 글은 예전과 조금 달라진 느낌이다. 화술과 진실함에 충분히 익숙해진 탓이겠지만 읽노라면 다소 김이 빠진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이어지고 있으며 세상은 문젯거리 투성이므로 그의 독설은 다시 제힘을 찾고 거침없음과 사실의 힘으로 다가올 것을 기대한다.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야간비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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