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감과 상처로 물든 한 여자의 삶

임선의 장편소설 <바람집>

등록 2003.08.25 14:19수정 2003.08.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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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바람집>
책 <바람집>한겨레 신문사
상처받은 여자의 삶은 슬프다. 이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불평등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속에 놓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겪는 상처들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 소설 <바람집>의 주인공 미진의 삶이 그러하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수도, 아니면 그녀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여 이 불행한 주인공의 삶을 묘사한다.


주인공 미진은 어린 시절 첩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막연히 공직에 있는 분이라는 얘기만을 들어 왔으며, 어머니마저 아버지를 따라 집을 떠난 상태이다. 부모의 부재 속에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란 배다른 오빠이다.

이 오빠를 비롯하여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많은 남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자전거를 태워준다며 성추행을 하는 동네 아저씨, 자신이 잠든 사이에 몸을 더듬는 오빠, 밭으로 끌고 가 그녀의 가슴을 만졌던 이름 모를 사나이 등은 그녀의 삶을 멍들게 만든다.

이렇게 상처로 뒤덮인 그녀가 선택한 직업이란 전화방에서 일하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남성에게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주고 그들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만이 그녀가 맘 편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직업에 매우 만족한다. 남성들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그녀는 그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벙어리 냉가슴'이라는 별명의 남자가 꿈꾸는 여성이기도 하고, '하얀 고무신'의 아내이기도 하다. '찢어진 우산'의 애인이기도 하고 '물먹는 하마' 돈을 주고 산 직업 여성이기도 하다. 전화선을 통한 대화 속에서 그녀는 상대 남성이 생각하는 여인이 되어 주는 것이다.

미진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이루지 못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너무 많은 상처와 상실감을 입었기 때문에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자신을 덮치려는 남자들, 여성을 탐하는 남자들로 가득 찬 공간이다. 결국 그녀는 타살인지도 자살인지도 모를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장편 소설은 '한겨레 문학상'이라는 걸쭉한 상까지 수상한 여성 작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가치를 발하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로 성적 피해자가 되어 버린 한 여성의 삶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더 가슴이 아프다.

성적 피해자의 삶이 가슴 아픈 것은 그 대상이 주로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이거나 군대의 낮은 계급이거나 힘없는 어린이들이기 때문에, 성적인 피해 대상이 된다. 사회적 보호의 틀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무심히 당하고만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피해자가 겪는 삶의 고통과 회의, 번민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최근 소설의 한 특징인 교차적 서술 시점, 교차적 시간 설정을 통해 혼란스러운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좀더 잘 포착하였다. 문학평론가 백지연은 해설을 통해 "현재와 과거, 그 사이로 스며드는 자유로운 환각의 연상들은 소설을 읽을 때 낯설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준다"고 전한다.

고전적 형태의 단선적 시점과 인과적 구성을 버리고, 단편적이고 끊기는 듯하지만 그를 통해 좀더 자유로운 의미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문학상의 이름에 걸맞는 가치가 있다. 소설 구성의 획일성을 탈피한다는 점에서 더욱 풍부한 의미를 구성하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이 장편소설 한 권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단면을 발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 삶의 모습이 칙칙하고 암울할 지라도 그것이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한 모습이기에, 이를 받아들이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불행한 사례는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바람집

임선 지음,
한겨레출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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