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재미에 산에 오르는구나"

<제주도 산방산 등정기> 산이 주는 삶의 소리를 듣는다

등록 2003.08.28 15:09수정 2003.08.29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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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에어컨 없이 자연바람에 의지해 무더운 여름을 나는데 익숙해 있는데도 올 여름의 막바지 더위가 열대야까지 이어지니 숨이 턱턱 막힌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하게 하는 몇 날이었다.


이틀여 감자를 놓느라 삭신이 쑤시지만 그렇다고 '아이고'하고 누워버리면 몸이 더 처지니 이럴 때 산행을 하면서 땀을 흠뻑 흘리면 온 몸이 개운해질 것 같은 생각에 지인들과 달포 전부터 약속했던 산행을 하기로 했다.

산방산 올라가는 길-남근바위라고 하는데 속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산방산 올라가는 길-남근바위라고 하는데 속칭인지도 모르겠습니다.김민수
산방산이 산행의 목적지였다. 이번 여름 휴가 때 아이들과 산방산에 갔다가 매표구 앞에서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14년 전 신혼여행을 와서 올라갔던 산방산을 상상하며 온 나의 불찰도 있었지만 입구부터 정사각형의 대리석 계단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이건 산이 아니라 고층건물의 계단같다는 생각, 정전이 되어 억지로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산방산에 올라갈 생각이 싹 가셔버렸다. 그렇게 산방산 근처에까지 갔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언젠가 계단이 아닌 등산로를 따라서 정상에 올라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뿐, 등산로를 모르는 나로서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시간들이 어긋나는지 산방산에 오르자는 약속을 한지 달포가 지나서야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초입은 여느 산처럼 평평했다. 뱀이 많으니 막대기를 하나씩 준비해서 가야 한다고 몇 번 산방산을 올랐던 길라잡이가 겁을 준다.


"난 뱀이 싫은디."
"지난 번엔 여기서 네 마리나 봤는데."

은근히 겁을 주는 안내자의 말에 발바닥이 근질근질거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기저기 꽃들이 피어 있으니 꽃구경에 취해서 뱀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김민수
카메라에 꽃을 담느라 천천히 올라가는데 앞서간 이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야, 두 마리다! 빨리와봐, 사진 찍어야지!"

꽃 찍기도 바쁜데 무슨 뱀 사진을 뱀 사진을 찍나하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있다면 한 장 담아볼 만도 하다고 생각되어 달려가는데 희한하게 생긴 나비 두 마리가 훨훨 날고 있다. 순간 내가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도둑놈의 갈고리
도둑놈의 갈고리김민수
선글라스 장사라도 하려는지 '도둑놈의 갈고리'가 깍지를 가지런히 진열하고 있고, 산으로 올라갈수록 수풀이 우거지는 것이 거의 밀림 수준이다.

한 10여분 올라갔을까? 아예 하늘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 속은 햇빛이 들어오질 않아 해가 어둑어둑 진 듯 어둑하고 마치 이른 새벽의 숲길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땅이 젖어 있다.

'콩짜개란'들이 바위며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있고 숲에서 나오는 나무들의 향내가 땀을 흘리느라 열린 땀구멍들 사이로 나의 몸에 고스란히 들어가는 듯한 신선함이 온 몸을 감싼다.

사우나에 가서 흘리는 땀과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는 땀, 물론 노동의 현장에서 흘리는 땀이 더 소중하겠지만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며 흘리는 땀은 참으로 소중하다.

시골생활을 시작한 지 일년 육개월여, 도시에서 살 때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사우나를 했었다. 처음 시골에 적응하기 힘든 것 중에 하나가 목욕하는 일이었다. 제대로 된 목욕탕을 가려면 차를 타고 30여분을 나가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 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러다가 목욕탕을 가지 않은 것이 거의 일 년 가까이 되었다. 작은 텃밭에서 흠뻑 땀을 흘리고나면 땀을 강제로 뺄 일도 없고, 찬물로 샤워만 해도 몸에서 뽀드득 소리가 나니 목욕탕에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김민수
등산로가 점점 가파라지고 비가 오면 계곡이 되었음직한 등산로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서 가는 길에 만난 동굴들은 천연 동굴인지 인공 동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인들과 함께 한 산행이 아니었다면 조금 으시시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산행에 동반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지, 그리고 우리 삶에 동반자가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구도자의 길을 감에 있어서 마음이 통하는 도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40여분 올랐을까? 동백나무숲이 나오는가 싶더니 앞서가던 분이 슬쩍 나에게 선두 자리를 양보해준다. 먼저 정상을 오르는 기쁨을 주려는 마음 따스한 배려다.

마치 터널을 빠져나오듯 나무 숲을 뚫고 '영차!'하고 정상바위에 오른 순간 "우와!"하는 감탄이 절로 몇 차례 연거푸 나왔다.

김민수
날씨가 흐려서 시야가 그리 넓은 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라도까지 보인다.

"야호!"소리가 절로 나는 산행, 산방산 아래로 펼쳐진 해안의 풍경들과 발 아래에서 날아다니는 새들의 비상, 저 멀리 보이는 형제섬과 용머리해안, 최근에 개장했다는 하멜상선이 호주머니에 하나둘 챙겨 넣어도 될 만큼의 크기로 눈앞에 펼쳐진다.

'이런 재미에 산에 오르는구나.'

김민수

산(山)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적이 없다.
때로는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사람에게 정상을 내어준다.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내려올 때도 있다.
산(山)
한 숨에 뛰어오를 수 있는 작은 동산도 있지만 때로는 사투를 벌여야만 올라갈 수 있는 산도 있다.

산방산은 한 숨에 뛰어오를 수 있는 작은 동산도 아니지만 사투를 벌일 만큼 힘든 산이 아니다. 천천히 올라가도 대략 50분 정도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산이다.

김민수

산방산이 깨우쳐 주는 삶의 소리 한 마디.

'작은 산이든 큰 산이든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이고 쌓여서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 그리고 정상에 오르기 직전의 마지막 한 걸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정상에 이르기 위해서 내려가야 할 때도 있는 법,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슬퍼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로만 올라가려고 하면 정상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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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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